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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 정 Jun 28. 2023

이미 한번 해냈는데, 이것쯤이야 못하겠어?

성공한 경험이 쌓이면, 새로운 도전이 쉬워진다

성공한 경험이 쌓이면 새로운 도전이 쉬워진다. 그 성공의 사이즈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한번 해봤다는 것, 그리고 해내었다는 것, 그때 느꼈던 나의 기분, 그것이 바로 다음 도전을 시작하는 나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새로운 도전을 할 때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신, 나의 결정에 대한 불안, 이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노력의 질량, 주변의 시선까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요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럴수록 많은 도전을 해본 경험이 더욱더 크게 작용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일을 시작해서, 일을 진행하고, 그러면서 부딪히는 각종 장애물을 뛰어넘고, 결국에는 일을 마무리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면, "이미 한번 해냈는데 이번이라고 못하겠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도전한 일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의 밑바탕이 된다. 소위 말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 혹은 근자감이 아니라, 경험에서 비롯한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항상 하고 싶은 일이 많고, 그런 일이 있으면 일단 하고 보는 편이다. 시작도 쉽고 포기도 빠르다. 하지만 될만한 일은 금방 캐치해서 밀어붙인다. 어릴 때부터 항상 구석에서 혼자 연구하고 생각하고 만들기를 좋아했다. 크면서도 그 성향이 변하지 않아서 관심사도 많고 해보고 싶은 일도 항상 많았다. 지금까지 시작해 본 수많은 자잘한 일들 중에는 블로그, 유튜브, 편입준비, 로스쿨 준비, 부동산 자격증 취득, 부동산 공증일, UX 디자인 커리어 전향, 미술작가, 영상편집일, 수입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몇 달 동안 붙들고 있다 포기한 일도 있고, 도전해 봤다가 돈만 잃고 망한 일도 있고, 해봤다가 내 적성에 안 맞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적도 있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직업이 된 일도 있다. 주변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새로운 일을 쉽게 시작해?" 좋게 보면 적응이 빠른 행동 대장이고 나쁘게 보면 진득하게 하는 일이 없는 산만함이다. 이렇게 act first, think second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기)이라는 철학으로 이것저것 시작해 보니 나한테는 꽤나 좋은 결과가 있었기에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왜, 어떻게 새로운 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봤다. 내가 유추해 낸 결론은 많은 도전을 하면서 쌓인 성공한 경험이다.


내 생에 기억하는 아주 첫 번째 큰 도전과 성공 경험이다. 아주 어릴 적에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서 엄마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몇 달 동안 생떼를 썼다고 한다. 그 이후에 엄마가 찾아주신 피아노 선생님께 배우다 몇 주 후 이대 교수님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 교수님의 지도 하에 3개월의 연습 후 8살의 나이에 전국 콩쿠르 1위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건강 상의 문제로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가 없었고 그 덕에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접어야 했다. 지금도 피아노를 보면 그때 생각이 떠올라 흐뭇하지만 피아노 앞에 서면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은 내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서러운 실력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그 이후로도 도전을 직면하는 나에게 항상 힘의 원천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의 일이다. 학교를 나가는 데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안 보이기 시작했다. 왜인지 싶어 물어보니 예중 입시 준비를 하느라 학원에 가 있다고 했다. 예술중학교? 말만 들어도 너무 신나는 상상이었다. 그래서 그 학교에 어떻게 들어가는 건데? 그날로 집에 가 예술중학교를 가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와 같이 동네 미술학원을 다 돌았는데 입시가 3개월밖에 안 남았다며, 학원 입시반의 합격률을 떨어뜨릴 거라며 아예 받아주지를 않았다. 나중에 예고 준비할 때나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거의 쫓기다시피 나왔다. 거의 포기해갈 즈음에 마지막 들어간 학원은 고등학교 입시반만 있고 중학교 입시는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화실에 나오면서 그림은 그리지만 별 큰 기대는 하지 말라며, 다음 주부터 나오라고 하셨다. 합격 못해도 상관이 없었다.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예술 학교에 대해 상상하는 거 자체로 너무 즐거웠다. 입시 직전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많은 화실들이 서로 합의하에 학생들을 다 모아두고 모의 실기 시험을 치는데, 내가 그린 그림은 완성이 되지 않아서 채점도 하지 않고 옆으로 제쳐두셨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시각화에 관련된 영상을 하나 보여주셨다.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였고 어린 마음에 시각화를 한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합격하는 모습, 원하는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모습 등을 매일매일 상상하면서 "나는 이 학교가 정말 가고 싶고 꼭 붙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그냥 즐기자 라는 마음이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깍두기로 제쳐져 있는 내 그림을 보고 비웃던 친구 한 명은 소식이 없었다. 통쾌한 마음을 뒤로하고 너무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훗날 중학교 입학식을 끝내고 실기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합격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던 내 실력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3개월간 입시 준비의 성공 경험 덕택에 좌절하지 않고 금방 이겨낼 수 있었다. 이미 한번 해냈는데, 이 정도는 못하겠어? 중학교 1학년 입학 후 첫 학교 전시에서는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중학교 3학년 선배가 아닌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의 작품이 전시 대표 작품으로 선정돼 학교 책자는 물론이고 각종 홍보 배너와 광고지 등에 인쇄되어 도시 곳곳에 뿌려졌다. 또 학교를 다니던 3년간 미술학원은 거의 다니지 않고 실기실에서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연습을 하며 졸업할 때는 미술부에서 성적이 3등 안팎으로 머무는 실력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2학년이 되던 해에 한동안 노트필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내 취향에 딱 맞게 골라놓은 펜 색깔들과 나름대로 정해놓은 나만의 노트필기 시스템이 있었다. 수업을 듣는 것보다 수업을 들으면서 예쁘게 정리해서 노트 필기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래서 노트필기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가 정리한 노트들을 책상에 올려놓고, 예쁜 펜과 지우개, 스티커 등으로 데코를 한 후 사진을 찍어서 하나씩 포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핵심 주제는 어떤 색깔로 하는지, 페이지의 콘텐츠는 어떻게 나누는지, 짧게 짧게 설명도 함께 적어서 올렸다. 어느 순간 네이버에서 추천 블로그에 내 노트필기 블로그가 기재되었다. 어느 펜시점에서는 협찬 글에 관심이 있냐며 연락이 왔다. 때는 2009년도였고 협찬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나한테 물건을 공짜로 주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이들은 사기꾼이다"라고 마음먹고 모두 거절하고 계속해서 블로그를 운영해 나갔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블로그는 그만두고 입시 준비에 집중하라는 부모님 말씀에 운영하던 블로그를 중단하고 입시 준비에 몰입했다. 지금까지 그 블로그를 계속 운영했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쉽기도 하고 참 재미있는 상상이다. 하지만 그 경험을 했기 때문에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자신 있게 글쓰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입시준비의 최절정을 달하던 시점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 아닌 기회가 생겼다. 당시에 부모님의 사이가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딸아이(나)의 교육을 핑계로 떨어져 시간을 보내게 된 거였다. 생전 처음 가보는 나라에 문화도 언어도 아무 소통이 안 되는 상태로 미국 고등학교에 던져지게 되었다. 수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전을 찾아봐도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단어 사전은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하다 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단어도 무조건 영영사전으로만 검색하고 영화도 자주보고 친구들에게도 무작정 웃으면서 "Hi! Can you be my friend?"라는 말 한마디로 비집고 들어가 같이 앉았다. 되짚어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성공한 경험들 덕분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외국 생활을 하다 보면 유학생들은 보통 학교에서 조용한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당연히 있다). 유학생들끼리 있을 때는 그처럼 웃기고 재밌고 생동감 있는 친구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언어적인 불편함은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고 괴롭게 한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 속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지금까지 해왔던 성취들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새로운 도전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그렇게 난감하던 미국 유학생활 2년 차가 되던 해에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미술 봉사 동아리를 만들었다. 재능 기부의 목적으로 만든 동아리 었다. 어린아이들이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미술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림 좀 그리는 것으로 당시 학교에서 조금 유명했는데, 스무 명이 조금 넘는 학생들이 동아리에 가입했다. 나는 무작정 동네 초등학교들을 찾아다니며 대뜸 "어린아이들의 방과 후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라고 물어봤다. 그중에 한 학교에서 저기 있는 액티비티 담당 선생님께 말해보라고 알려주었고, 그 선생님께서는 다음 주까지 프로그램에서 가르칠만한 커리큘럼을 짜서 가져오라고 하셨다. 당장 발에 불이 떨어진 나는 집으로 돌아가 종이접기, 핑거페인팅, 해양동물 그리기, 빨대로 그림 그리기,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초등학생 전용 그림 그리기 커리큘럼을 적어서 프린트한 후 다시 학교로 쫓아갔다. 그리고 매주 화요일 목요일 방과 후 3시부터 한 시간씩 미술 프로그램을 가르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맞벌이를 하거나 부모님의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일찍 집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스케줄이었다. 미국 고등학교는 졸업할 때 필수로 끝내야 하는 봉사시간이 있다. 우리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졸업을 위한 봉사활동에 우리 동아리의 미술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결론적으로 졸업할 때 필수로 필요한 봉사활동 시간을 채울 때 우리 동아리 활동을 기입하고 사인을 받을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언어도 익숙하지 않았던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봉사 동아리를 만들고 졸업하는 마지막 해까지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은 이후에도 동양인 이민자로서 미국 생활을 하며 난관에 부딪혔을 때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엘에이에서 지나가던 갤러리 오프닝 이벤트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굉장히 사람도 많고 정신이 없었다. 작품도 구경하고 설명도 들으면서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에 전시 기획일을 하는 분과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대화를 하던 중에 내 작품을 보여드리게 되었고, 내 그림이 마음에 드셨는지, 작품을 몇 개 가지고 자기를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내 그림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니 들뜬 마음에 얼른 집에 있던 작품 몇 점을 들고 갤러리로 돌아갔는데 이 분과의 만남 덕분에 2년 동안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 그리고 엘에이 아트 쇼(LA Art Show)에 작품을 출품하고 전시하면서 즐거운 경험을 했다. 신문에 내 전시소식이 기사로 실리기도 하고, 전시장 앞에서 내 작품에 대해 인터뷰도 했다. 별생각 없이 그렸던 작품 한 장은 이십여 개의 시리즈로 재탄생했고, 대부분의 작품을 팔고 남은 두 점은 내 방 벽에 아직도 걸려있다. 시카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은 상황이었는데,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여기저기 부모님께 손 벌리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적어도 내 생활비는 내가 해결하면서 살고 싶었다. 작품활동을 하면서 자유롭게 내 시간을 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고 찾아보다 뚱딴지같지만 부동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단 자격증이라도 따보자는 생각에 방학과 수업 사이 남는 시간을 쪼개어 부동산 중개업자 자격증을 땄다. 초반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부동산 시세를 보고 투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정도였는데, 자격증 공부를 하던 부동산 회사에서 자기네 회사에 자격증을 걸어두고 (애리조나 주는 일반 에이전트의 경우 브로커의 오피스에 자격증을 걸어두어야만 자기 사업을 할 수 있다) 일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아직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는 너무 결이 다른 신선한 일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 파트타임 (part time)으로 시작한 일은 자격증을 딴 첫 달에 바이어와의 계약을 성사하는 예상치도 못한 성공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보통 부동산 중개업의 경우 계약이 성사된 후에만 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와 몇 달씩 일을 하다가도 뒤통수를 맞는다던가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거래를 취소하는 경우 몇 달간 공들인 일이 헛발길질이 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beginner’s luck이라고 하기 좋은 상황인데, 내 경우에는 처음 집 앞에서 만난 바이어가 직접 내게 중계 업무를 전담한다 부탁하고 시작부터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시작했다.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거래를 성사시키고 12,000 불이라는 거금을 수수료로 벌게 되었다. 브로커가 50%를 가져가고 내 수중에는 6000불이 들어왔다. 학생 신분으로 6000불이라는 돈이 작은 돈이 아닌 데다가, 부동산 중개업자의 90%가 첫 1년 동안 수익을 전혀 벌지 못한다는 통계를 봤을 때 대단한 성과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성공 경험을 한 것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두려움 보다 신나는 일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부동산 일에 재미를 붙여갈 때 즈음 코로나 펜데믹으로 일이 점점 힘들어져갔다. 또 세일즈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미술을 안 하겠다며 등을 돌려놓고, 다시 창작하는 일을 할 때가 그리워졌다. 나는 원체 변덕이 심한 사람인데 이번에도 어림없이 또 다른 길을 찾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창의적인데 돈도 잘 버는 직업이라고 구글에 검색해 보니 제일 위에 뜨는 것이 UX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그 길로 UX 디자인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UX 디자인과 관련된 경험도 없고, 무슨 일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직업에 대해 검색하고 설명을 읽어보니 할만할 것 같았다. 재밌어 보였다. 주변에 이미 이쪽에서 일을 하고 있던 지인이 있었다. 일은 어떤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몇 가지를 물어보고 당장 UX를 배울 수 있는 부트캠프 중에 지인이 추천해 준 general assembly에 수강 신청을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UX 디자인이라는 것에 도전해 보자라고 처음 결심한 후 2주 만의 일이다. 지금까지 도전해 본 일 중에 가장 가능성도 높아 보였고 내가 덤벼보기 가장 만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강 시작 직전에 집을 한채 더 팔아 3개월간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무작정 뛰어든 3개월 만의 UX 디자인 부트캠프를 마치고 경력도 경험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부트캠프만 마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같이 거절당했다. 하지만 뭐든 될 거라는 막연한 확신히 있었다. 돈도 받지 않고 비영리 단체를 찾아가 UX 디자인 관련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서 공짜로 컨설팅을 하고 디자인 일을 해주었다. 일이 끝나면 내용을 정리해서 포트폴리오에 집어넣고 이력서를 수정하고 다른 비영리 단체를 찾아가 다시 그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두달간 진행된 짧은 계약직을 받아냈고, 두 달 계약이 끝나가던 무렵 두 개의 회사에서 동시에 취업 합격 연봉 계약서(offer letter)를 받으며 부트 캠프 졸업 후 약 3개월 만에 취직에 성공했다. 같이 부트캠프를 졸업한 20여 명의 졸업생 중에 10년간 디벨로퍼로 일한 경력이 있던 한 졸업생을 빼고는 내가 두 번째였다.


그 이후에도 내 도전은 계속 됐다.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결과에 여의치 않고, 내 구미에 당기는 일이 있으면 시도해 보고 재미있으면 계속했고 아니면 다른 관심사로 옮겨갔다. 일을 시작한 지 약 2년이 되기 전에 시작 연봉보다 몇만 불 이상의 연봉과 보너스 급여를 주는 회사로 옮겨갔다. 그동안 한 개 스타트업의 가장 첫 VC 펀딩을 받는데 기여하고, 다른 한 스타트업의 신사업 디자인을 도맡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회사 밖에서는 막걸리 빚기에 도전해서 1년째 단양주, 이양주, 삼양주, 삼해주, 감귤막걸리, 대추막걸리, 청주, 흑미청주 등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를 빚는 취미가 생겼고,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는 춘천의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우리 술과 막걸리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배웠다. 오랫동안 쉬었던 복싱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주일 간 혼자 떠난 로드트립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아직까지 연락하는 친구가 생겼고, 새로운 레시피에도 많이 도전해서 직접 만든 맛있는 요리도 많이 먹었다. 이제는 노트 필기 블로그 이후로 성인으로서 처음 글쓰기와 블로그에 도전하고 있다. 성공한 경험이 쌓이면 새로운 도전이 쉬워질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전을 통해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자아성찰의 기회도 많아진다.


새로운 도전에 앞서 걱정과 고민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너무 커서 시야를 가리고 행동하기가 두려울 때에는 내가 지난날 도전하고 성공했던 기억들이 있는지 가만히 돌이켜 보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만약에 그렇다 할 성공 경험이 없다면 작은 도전부터 시작해서 성공 경험을 조금씩 쌓아가는 것이 좋다. 매일 아침 10분씩 산책하기, 자기 전에 5분 명상하고 자기, 등 작은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경험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새로 시작한 일, 새로운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성공 경험을 쌓는 데에는 성공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그에 대한 성과를 직접 누리는 경험. 그런 경험이 누적되면서, 점점 도전이 쉬워지는 경험. 작은 성공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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