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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y 25. 2023

무모한 일본 도전


1989년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밤에 이불 속에서 잠을 청했지만,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머리맡에 있는 라디오를 틀며 채널을 돌리는데, 북한 사투리 억양의 명령어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볼륨을 줄이고 다시 한번 다른 채널을 돌리자, 일본말이 귀에 솔깃합니다. 신기한 나머지 자세히 듣고 싶어 주파수를 맞춰 보았습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 잡지 등 일본 문화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이면 왠지 부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느껴졌고, 일본에 다녀온 한국인도 마치 모국어가 서투른 듯 나에게는 부러웠던 대상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불 속에서 꿈을 꾸며 결정했습니다. “그래 나도 일본 한 번 가보자…….”


미용 기술이 있던 나는 부모님께 연수차 일본에 다녀오겠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겨우 승낙받았습니다. 어렵사리 비행기 왕복권과 여행자금을 갖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제일 먼저 서울 친구들을 만나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술 한 잔 사겠다.”라고 호출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술값을 지급했습니다. 아침에 술이 깨어 지갑을 열어 보니 남아있는 돈은 달랑 5만 원…….그 돈을 환전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태산입니다. 여행자금도 다 쓰고 일본어도 모르며 연고지라고는 전혀 없이 해외를 처음 가면서 무슨 배짱인지, 그래도 결심은 굳어졌습니다. “그래 거지가 되더라도 외국 거지는 양주라도 마시더라.…….”그렇게 허황한 꿈을 갖고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두 시간 남짓 도착한 곳은 일본 오사카 공항입니다. 공항심사를 거쳐 지하철을 타려고 이동한 뒤 안내 게시판을 보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일본어와 영어로 게재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오사카역을 찾아 일단 지하철을 타고 출발했습니다. 오사카역에 하차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반갑게도 ‘코리아 레스토랑’이란 영어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배는 채우고 움직이자” 이같이 마음먹고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한국 돈 5만 원을 환전하니 엔화는 만 엔 남짓 했습니다. 만 엔의 값어치는 대략 일본에서 하루의 숙식 정도 금액으로 추정됩니다.


식당에 들어서자, 남자 종업원이 일본말을 하면서 자리를 안내했습니다. 메뉴를 보는데 그 종업원이 “한국분이에요?”라며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네” 대답하면서 “일본은 처음인데 일본어도 길도 몰라 걱정입니다.”라고 언급하자 남자 종업원이 “그러시면 우리 집에 머물면서 여행하세요.”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웬, 땡이야! 하며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운이 안 좋으면 일본에서 거지 탈을 쓸 뻔했으니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캐리어를 끌고 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한 집은 1층 미용실, 2층은 일본식 주택 다다미방이 남자 종업원이 사는 거주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어학원 유학생이었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으니 형 대우를 해줘야 숙식 걱정 없이 여행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깝게 지냈습니다. 


다음날, 형이 아래층 일본 미용실에 잠시 다녀오더니 “손님 헤어드라이어를 해줄 수 있냐?”면서 미용실에서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반가운 말에 곧장 내려가 일본 손님 머리를 헤어드라이어를 해줬습니다. 그 손님은 팁이라며 천 엔을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날은 오전 잠깐 사이에 만 엔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형은 아르바이트하러 식당으로 가는데 혼자 집에 있기 뭐해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형이 일하는 식당 인근에서 마치기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는데 다국적 외국인들이 모인 노상 칵테일 바에서 젊은 친구들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나는 칵테일 바에서 칵테일 한잔을 주문하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 콧수염 달린 바텐더와 손짓, 몸짓, 영어까지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형이 아르바이트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다 같이 퇴근길을 걸었습니다. 


다음날,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데 콧수염 바텐더와 그새 가까워졌습니다. 콧수염 바텐더는 옆 좌석 일본 여성 손님 두 분과 소통하면서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여성은 일본 전통술을 대접하겠다며 나를 데리고 일본 선술집으로 안내했습니다. 일본 술을 맛보며 손짓, 몸짓, 영어까지 할 수 있는 언어는 다 사용한 뒤 우린 이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런 후 아르바이트를 마친 형을 만나 함께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다음날, 일본에는 오봉이라는 추석이 왔습니다. 1층 미용실도, 형이 일하는 식당도, 일본 전역의 업소가 휴무입니다. 저녁에 길거리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관람했지만, 오봉 추석은 연휴가 보름 정도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 당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는 보름이었습니다. 나는 보름 가까이 지내면서 형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겪으며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환전했던 만 엔이 그대로 지갑 안에 있는 것입니다. 훗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형은 교토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일본 선술집에 데려간 여성 두 분은 한국으로 여행 와서 가이드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일본 여행을 돈 없이 즐기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절대 자랑하고 싶지 않은 무모한 행동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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