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그때도 이게 도피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그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 결정이 옳았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고요. 물론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을 많이 응원하고 칭찬합니다.
도망친 곳엔 낙원이 없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제는 내가 경험이 많고 마음이 튼튼하니까, 지금 자리에서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경기도의 한 브런치 카페. 커피와 구수한 빵 냄새, 그리고 사장 포스를 폴폴 풍기는 한 남자.
오늘의 주인공, 카페 알바 연일 씨.
태국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그는 요즘, 한국의 어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서른아홉, 인생의 또 다른 정류장에서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인터뷰했다.
조엘: 이곳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연일: (조금 뜸을 들이며) 일한 지 얼마 안 된 초보입니다.
조엘: 힘들진 않으세요?
연일: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조엘: 카페 사장님이었다고 들었어요.
연일: 제가 몇 년 전까지 태국 방콕에서 규모 있는 카페를 운영했거든요.
조엘: 태국이요?
연일: 지금은 한국에 들어와 있고, 매장은 사업 파트너인 친구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른세 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태국으로 떠난 연일 씨는 번화한 방콕 쇼핑몰에서 카페를 오픈했다.
평범한 회사생활, 지루한 일상... 점점 나이는 드는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연일: 이십 대 중반에 취업을 하고, 삼십 대 초반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십 년 후, 이십 년 후를 그려보는데 잘 안 그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사직서를 냈죠. 처음에 태국에 갔을 땐 돈을 벌러 간 게 아니었어요. 한국에서보다 반의 반만 벌어도 좋으니까 일보다 내 삶의 주축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런데 감사하게도 카페가 너무 잘됐어요.
퇴사 후 성공한 카페 사장. 그럴듯해 보이는 타이틀 뒤로 그가 진정 얻은 건 태국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조엘: 태국 생활은 어땠어요?
연일: 진짜 우연하게, 지금도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현지 친구를 얻었거든요. 여전히 태국과 한국을 서로 왕래하고 있고요. 그 친구가 산악 바이트를 타는 취미가 있어서 저도 함께 타게 됐고, 태국 전역에 있는 산을 다 가봤죠. 저 혼자 한국인이니까 태국 분들이 엄청 좋아하고, 한국말도 배워서 건네주시고. 외국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산골 주민분들은 저를 보고 놀라기도 하고요.
조엘: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셨네요.
연일: 맞아요. 십 년 넘게 태국에서 사신 분이 저처럼 사는 한국인은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보통 한국 사람들과 한인 타운에서만 지내는데 태국 사람들과 어울려서 산악 바이크도 타고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한국인은 처음 봤다고. 그때 알았죠. 이게 당연한 게 아니라 굉장한 경험이구나,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구나.
때론 무모하게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때로는 불안하고, 여전히 방황도 한다. 십 년 후에는 틀림없이 완성될 것 같던 그림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
우리 인생에는 예약석이 없듯이 도착지라고 믿었던 그곳에서 다시 돌아온 연일 씨.
연일: 태국에서 지낸 마지막 1-2년 동안 사업적인 고충이나 외국인으로서 어려움, 개인적인 고민들이 겹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친구와 차를 타고, 공항에서 오는 길에 덜컥 말했어요.
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당황스러웠을 텐데,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친구는 덤덤하게 그를 품어주었다. 몇 달도 좋고, 그 이상도 좋으니 편하게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게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왔다. 잠깐일 것 같던 시간은 벌써 3년이 흘렀고, 그 사이 연일 씨는 뚝딱거리는 알바가 됐다.
조엘: 카페 사장에서 아르바이트로 돌아오셨네요. 지금 생활은 어때요?
연일: 제가 사장으로서 카페를 운영할 때는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됐죠. 여러 가지 상황을 마주하다 보면 직원들 생각이 많이 나요. 그 친구들도 이럴 때 굉장히 힘들었겠구나. 끝나고 집에 가면 태국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요. 일을 하다 보니까 너희 고충도 알고, 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미안하고, 고맙다
그렇게 연일 씨는 인생의 정류장에서 뒤를 돌아본다. 불안하고 초조했던 지난 삶도 때론 달콤했음을 깨달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조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연일: 외국 여기저기서 살기도 했고,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했어요. 스펙을 쌓고 다시 취업을 해야 하는 시기에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부럽다고 하면 쑥스럽지만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누구나 갖게 되는 자유를 나는 조금 당겨 쓰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면 사실, 그때도 이게 도피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그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 결정이 옳았나 의구심을 가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을 많이 응원하고 칭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도망친 곳엔 낙원이 없다, 이제는 내가 경험이 많고 마음이 튼튼하니까 지금 자리에서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어쩌면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함을 부여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카페 사장이기 때문도, 태국 생활 때문도 아니다. 도피하듯 휩쓸려 다녔던 지난 삶 속에서 누구보다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이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뜨는 것
by 마르세 푸르스트
연일 씨의 다음 여행을 응원한다.
https://youtu.be/eL8i5mM6QdI?si=JNc5VZwATKTXoa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