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유산을 남기고 싶나요?

9장. 돈 대신 남기는 것. 따뜻한 감정

by 이향인 조엘
STORY

동네 산책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전철을 타셨습니다. 종로에 약을 사러 간다면서 3호선을 타고 엉뚱한 곳으로 향하셨죠. 저는 애플태그로 아버지의 위치를 확인하며 서둘러 양재역으로 향했습니다.


“아빠, 전철을 잘못 타셨어요. 제가 갈테니 거기 계세요!”

“나 종로에 있는데 약만 사가지고 갈게.”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버지는 분명 양재역 어딘가에 계셨습니다. 겹겹이 얽힌 지하철역의 구조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애타게 찾고 있는데, 애플태그의 점이 대치역으로 쑥- 이동합니다. 다시 전철을 타신 모양이었어요.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애플태그만 있으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 던 저의 믿음은 무너지고, 치매 아버지에게 자유를 주자던 저의 말은 두려움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빠, 어디 계세요? 저 근처에 있어요.”

“난 종로 약국 가는 중인데, 너 먼저 집에 가 있어.”

“근처에 뭐가 보여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여기? 아파트가 보이는데... 넌 먼저 집에 가 있어. 아빠 약 사가지고 갈게.”


아버지는 고집을 부립니다. 대치동에서 상상 속의 종로를 거닐고 있는 아버지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발을 동동 구르던 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빠, 나 길을 몰라... 같이 가자.”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길을 몰라?"하고 되묻더니 저를 찾기 위해 대치역으로 더듬더듬 돌아오셨습니다. 저 멀리서 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길도 잃고, 밥 먹는 것도 잊지만, 사랑하는 법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딸이 길을 잃었다는 한마디에 그 아득한 치매를 이겨내고 쫓아오실 만큼.


그 안에서 저는 유산을 받고 있습니다. 그건 돈보다 강력한 감정의 유산입니다.


INSIGHT

사랑은 치매도 지우지 못하는 부모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감정 유산의 씨앗이고, 이 씨앗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자녀가 받는 유산의 크기와 무게가 달라집니다.


부모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자녀를 향한 씨앗이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햇살이 비추어지고, 비가 내려야 뿌리를 내립니다. 감정 유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태도로 사랑을 드러내고, 마지막까지 자녀가 사랑받았음을 확인할 때 그 씨앗은 싹을 틔웁니다. 단순히 “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씨앗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의식 있는 부모는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출발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깨어 있는 태도에 부모와 자식의 마음은 잠시 후련할 테지요.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사랑을 나눌 기회가 닫힌, 굳게 잠긴 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부모는 말과 태도로 감정적 이별을 준비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도 나를 사랑했다” 이 짧은 고백이 자녀에게는 평생의 증거가 됩니다. 그것은 씨앗에 햇살을 비추는 일과 같습니다.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흔적이 깊어집니다. 자녀는 그 흔적 속에서 사랑을 다시 발견하고, 삶을 버틸 힘을 얻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부모는 그 사랑의 씨앗을 구체적인 설계로 키워냅니다. 내가 받고 싶은 돌봄을 기록하고, 감정적 사전의향서를 남기며 자기 돌봄의 루틴을 마련합니다. 씨앗을 풍성한 열매로 키우는 토양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체적 설계입니다. 계획 없는 사랑은 흩어지고, 말뿐인 다짐은 쉽게 잊힙니다. 하지만 실천이 동반된 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유산이 됩니다.


부모가 마지막까지 남기는 진짜 유산은 돈도, 물건도 아닙니다. “끝까지 나답게 살았다”는 자기 돌봄의 흔적과 “너는 사랑받았다”는 감정의 씨앗이 함께 엮여 만들어낸 잘 가꿔진 감정의 유산입니다.


그 유산을 받은 자녀는, 부모의 떠남 속에서도 삶을 지탱할 힘과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TOOLKIT

감정 유산을 키우는 구체적 설계

죽음을 상상하는 연습

오늘 내가 떠난다면 누구와 어떤 장면 속에 있고 싶은지 떠올려 보세요. 죽음을 구체적으로 그려볼수록 지금 남길 감정의 방식이 분명해집니다.


마지막 장면을 디자인하기. 집에서 떠나고 싶은지, 병원에서 떠나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 기록해 두세요. 장소와 사람을 정하는 일은 감정 유산을 어떤 모습으로 남길지 설계하는 일입니다.


존엄의 기준 세우기. 체면이 아니라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은 ‘나다움’을 적어보세요. 자녀에게 남겨질 가장 선명한 감정 유산이 됩니다.


돌봄의 골든타임을 의식하기. 간병이 아닌 감정이 남는 시간, 아직 함께 웃을 수 있는 순간에 집중하세요. 그 기억이 남아 자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의료·돌봄 의사결정 준비하기. 연명의료, 호스피스, 요양·재가 서비스에 대한 나의 선호를 정리하세요. 선택의 기록은 두려움 대신 사랑을 남기는 준비가 됩니다.


재산보다 감정의 유산 남기기. 돈과 물건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전하고 싶은지 글로 남기세요. “너는 사랑받았다”는 메시지가 가장 오래가는 유산입니다.


집이라는 마지막 무대 상상하기. 내가 마지막까지 머물고 싶은 공간, 창문 밖 풍경, 곁에 두고 싶은 물건을 적어두세요.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감정 유산이 머무는 무대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부모가 될 당신에게

지금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면, 그 경험은 언젠가 당신이 돌봄을 받을 때 필요한 '태도'를 가르쳐줍니다. 돌봄은 연습이고, 유산은 감정으로 전달됩니다. 당신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마인드 가드너]라는 이름으로

돌봄과 죽음을 감정의 언어로 가꾸고 있어요.

가족 돌봄의 여정은 영상으로도 기록합니다


유튜브 ‘조엘의 정원’ [치매 아버지에게 '유산'받는 법 Ep]에서 함께 해요!

http://www.youtube.com/@joelles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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