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포기각서를 제출합니다

6장. 이럴 땐 감정보다 경계가 먼저

by 이향인 조엘
STORY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유독 버거울때가 있습니다. 오가는 대화나 주고받는 행동 때문은 아니에요. 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저를 짓누룹니다. 어떤 날은 엄마의 한숨에 하루가 무너지고, 어떤 날은 어두운 표정에 가슴이 쿵 내려앉고.


왜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왜 그런 감정이 깊이 박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엄마의 감정을 먼저 감지하며 살아왔어요. 엄마의 말보다 기류를 읽고, 표정보다 숨결의 속도를 먼저 느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채득한 가족 내 생존 방식이었어요. 엄마가 불안할 때 저는 얌전해졌고, 엄마가 지쳐 있음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깔린 감정을 너무 잘 알고 있죠. 하소연, 체념, 불만, 걱정.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느끼니까요. 그 감정들은 꽤나 무겁게 다가옵니다.


감정력이 통하지 않는 대상

아버지를 돌보면서 감정력을 배우고 익히고 있지만, 엄마와 함께할 땐 그 감정력이 도통 작동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쉽게 무너지고, 더 깊은 상처를 받는 이유는 엄마가 풍기는 정서적 에너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저와 엄마가 오랜 시간 만들어온 관계의 패턴, 즉 오래된 감정의 회로 때문이겠죠.


저희 엄마는 선하고 좋은 분입니다. 누군가 피해 입는 게 싫어서 혼자 묵묵히 참고 견디는게 일상입니다. 자녀에게도 싫은 소리, 서운한 내색 한번 안하는 분이니 저에게 감정을 떠넘기려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의 정서를 무의식적으로 책임지려 애써왔고, 그래서 더 자주 억울하고 더 쉽게 지쳐갔어요.


INSIGHT

감정 경계가 먼저 필요한 관계

감정력은 관계를 회복하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회복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감정의 거리, 정서적 경계를 세우는 일입니다. 저와 엄마와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경우죠. 감정력을 적용하려 할수록 무너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저 자신을 분리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소용돌이

엄마는 왜 나를 인정해주지 않지. 잘했다, 수고했다, 네 덕분이다 한마디 해주면 좋을텐데.

엄마는 왜 또 그러지? 나도 힘들다고! 다같이 힘내고, 으쌰으쌰하면 안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엄마는 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서운함이 쌓이지?

엄마가 힘들다는 걸 알지만, 나도 더 이상 버틸 여유가 없어.

이 집에서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다 내 탓인가?

내가 뭔가 해줘도 엄마는 기뻐하지 않아. 내가 필요한 존재일까?


감정의 방패

엄마는 스스로도 인정받은 경험이 적으니까 표현을 못하는 것 뿐이야.

엄마의 방식은 틀린 게 아니라 익숙한 생존 전략이야

엄마는 표현을 못할 뿐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야.

이건 엄마 감정이지, 내가 해결할 일이 아니야.

엄마의 기분을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엄마가 바뀌지 않아도 내가 반응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어.

지금 이 순간, 나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해.


감정이 무너지고 있을때 이러한 문장들은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줍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무거움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경계 부족' 때문이니까요. 감정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면 정서적 경계를 세우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세요.


나는 어디까지 돌볼 수 있을까요?

감정이 너무 얽혀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회복되지 않습니다. 저와 엄마,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 관계의 구조적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어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인간 관계는 절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어딘가 나사 빠진 듯 그렇게 설계됐어요. 그러니 감정을 지키기 위해,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제도를 활용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어디까지 돌볼 수 있는지를 아는 것. 그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감정력의 진짜 이름일지 모릅니다.


그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만이 돌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에서 벗어나 어떤 시스템 안에서 나답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원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그것을 만들고 설계해 나가는 용기, 그것이 죽는 순간까지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길입니다.


TOOLKIT

감정력의 한계를 알려주는 신호: 선을 긋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

감정의 소모가 반복되며 몸과 마음이 동시에 지칠 때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과하게 반응하거나 눈물이 나올 때

잠이 오지 않거나 자고 나도 피로가 가시지 않을 때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를 때

도와달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지만 끝내 꺼내지 못할 때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포기’로 느껴질 때

돌보는 마음보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질 때

이전에 즐겁던 일이 아무런 의미 없이 느껴질 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누구와도 연결되고 싶지 않을 때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다”라는 속마음이 들 때


이 신호가 보인다면, 감정력의 영역을 넘어선 감정 상황입니다. 스스로에게 “이건 내 선을 넘는 일이야”라고 외치세요. 동시에 정서적 거리두기, 제도적 도움, 외부 자원 활용이 필요한 순간임을 인지하고 행동하세요.


감정력은 모든 관계에 똑같이 적용되는 기술이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을 회복하기보다 지켜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이해보다 경계가 먼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닌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예방입니다.


[마인드 가드너]라는 이름으로

돌봄과 죽음을 감정의 언어로 가꾸고 있어요.

가족 돌봄의 여정은 영상으로도 기록합니다


유튜브 ‘조엘의 정원’ [치매 아버지에게 '유산' 받는 법 Ep]에서 함께 해요!

http://www.youtube.com/@joelles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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