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 김밥
"오징어 덮밥 하나, 14불 23전입니다." '불'과 '전' 역시 달러와 센트를 뜻하는 음차 단어들이다. 과거에 달러 표시인 $를 아닐 불(弗) 자를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된 '불'과 센트 단위의 화폐는 지폐가 아닌 전(錢) 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전'은 여전히 미국의 한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단어들이다. 더 이상 프랑스를 '불란서', 스페인을 '서반아'라고 하는 건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멀쩡한 원래 명칭을 놔두고 굳이 중국식 음차 표기를 할 필요는 당연히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뭔가 '가주'와 '나성', '불'과 '전' 등의 단어는 먼 미국 땅에서 내가 여전히 한국인임을 느끼게 해 준다. 사소하지만 이러한 언어습관 하나하나가 모여 한국과의 유대를 형성하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같다.
언어뿐만 아니라 음식도 마찬가지다. 무얼 먹느냐는 너와 나의 공감대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주변에 비건 혹은 베지테리안 친구들이 종종 있다. 아무리 말이 잘 통하고 같이 놀면 즐거워도, 이 친구들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 존재한다. 갓 튀긴 따끈한 치킨에 맥주 한 잔이 땡기는 금요일 밤에 함부로 불러낼 수 없다.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던 프로젝트 마무리 기념으로 꽃등심과 살치살을 조지러 가자고 할 수도 없다. 빵 한 조각을 먹더라도 계란이 들어갔는지 확인해야 한다. 나와 같은 식생활을 갖지 않은 친구라면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쌀밥은 중요하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실 쌀이라는 곡식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을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문화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존재한다. 쌀 소비의 90%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루어진다지만 쌀을 이용한 요리들은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의 빠에야, 이탈리아의 리조또, 미국의 잠발라야, 멕시코의 토마토 밥 등등 모두 쌀을 이용한 요리다. 아시아로 넘어오면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윤기가 촤르르 흐르고 찰진 흰쌀밥은 생각보다 찾기가 힘들다. 자포니카라는 이 품종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북아 지역에서만 주로 소비되며 전체 쌀 품종들 가운데 약 10%만을 차지한다고 한다. 훅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은 장립종 쌀은 볶아 먹으면 참 맛있는데, 이걸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쌀밥을 지어 반찬과 먹는 그림은 영 그려지지 않는다.
나성의 가주마켓 김밥 코너에서 산 오징어 볶음은 내가 찾던 한국의 맛이었다. 초등학생시절 방과 후에 친구들과 천 원짜리 몇 장을 쥐고 찾아간 분식점에서 먹던 그리운 맛. 제육볶음과 오징어볶음 사이 항상 고민하던 10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센 불에서 금방 볶아낸 오징어는 아주 부드러웠고, 양배추와 당근은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었다. 매콤한 고춧가루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달큰함과 참기름의 고소함은 건더기 없이 양념만 따끈한 흰쌀밥에 쓱쓱 비벼 먹어도 만족스러움을 자아냈다. 같이 온 단무지와 김치, 장국은 단촐하지만 없으면 섭섭할 분식점의 매력둥이들이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 맞는 것 같다. 곧 한 달 동안 한국에 방문한다. 벌써부터 맛있는 밥을 잔뜩 먹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