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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땡땡 Jul 20. 2023

미국 나성에서도 밥심, 오징어볶음

@가주 김밥

곧 한국에 간다고 요 며칠 알차게 냉장고 파먹기를 했더니, 순 빵과 파스타만 주야장천 먹게 돼 더 이상 밀가루의 '밀'자도 보기 싫은 지경에 이르렀다. 밥이 필요했다. 하얗고 따끈한 쌀밥.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크게 한 숟가락 푹 퍼 새콤하게 잘 익은 배추김치 한 조각을 올리고 바삭한 김으로 싸서 한 입에 냠.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한 달 넘게 집을 비울 예정인데 김치 한 통을 통째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외식을 한다. 하지만 쌀밥에 김치만 파는 식당은 없으니 메뉴를 정해야 한다.


엘에이에는 폭염이 덮쳤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기분이 찜찜하다. 시원하게 냉면 한 그릇을 먹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내 몸이 간절히 원하는 건 면이 아니라 밥이다. 그렇다면 하얀 쌀밥과 어울리는 뽀얀 국물의 설렁탕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김이 펄펄 나는 국물에 체온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좀 더 화끈하게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매운 음식! 혀 끝을 짜르르하게 자극해 더위에 녹아내리는 정신을 확 들게 만들어 줄 매운맛이 필요했다. 뭘 먹어야 할지 메뉴가 바로 떠올랐다. 


코로나를 겪으며 이곳의 외식 물가는 천정부지를 모르고 치솟았다. 체감상 한식당들 물가가 제일 오른 것 같다. 예전엔 그래도 점심 특선으로 세금 포함 김치찌개 $12.99, 불고기 정식 $13.99 등을 제공하는 식당들이 꽤 있었는데, 요즘은 세금도 따로 받으면서 동일 메뉴들이 $16.99에서 $18.99 수준으로 올랐다. 세금과 팁을 포함하면 외식을 하는 날엔 한 끼에 $22-23은 기본으로 나온다. 정말이지 헉 소리가 절로 나는 금액이다. 특히나 한국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면 8,000원에서 12,000원 사이에 먹을 수 있을 텐데를 생각하면 섣불리 지갑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불향 가득 오징어 볶음

이런 상황에서 비교적 저렴한 분식집들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들이다. 게다가 맛까지 있다면 말이다. 김밥과 떡볶이는 <더 김밥>, 만두는 <창화당>, 덮밥류는 가주마켓 내 <가주 김밥>. 불향이 가득한 매콤 달콤 오징어 덮밥을 먹기 위해 가주마켓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를 '가주'라 부르는 건 정말이지 정겹다. 가끔 가주가 어디서 나온 말이냐 묻는 친구들이 있는데, California의 CA를 독음 그대로 읽은 '가'에 state를 뜻하는 주(州)를 붙여 만들어진 음차 단어다. 마찬가지로 <나성교회> 등으로 엘에이 곳곳에서 자주보이는 단어 '나성'은 Los Angeles를 줄인 LA의 '라'에 city를 뜻하는 성(城)이 두음법칙에 따라 '나성'으로 정착한 것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라는 세셈트리오의 1978년 노래 <나성에 가면> 역시 이 나성을 가리킨다.


"오징어 덮밥 하나, 14불 23전입니다." '불'과 '전' 역시 달러와 센트를 뜻하는 음차 단어들이다. 과거에 달러 표시인 $를 아닐 불(弗) 자를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된 '불'과 센트 단위의 화폐는 지폐가 아닌 전(錢) 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전'은 여전히 미국의 한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단어들이다. 더 이상 프랑스를 '불란서', 스페인을 '서반아'라고 하는 건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멀쩡한 원래 명칭을 놔두고 굳이 중국식 음차 표기를 할 필요는 당연히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뭔가 '가주'와 '나성', '불'과 '전' 등의 단어는 먼 미국 땅에서 내가 여전히 한국인임을 느끼게 해 준다. 사소하지만 이러한 언어습관 하나하나가 모여 한국과의 유대를 형성하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같다.


언어뿐만 아니라 음식도 마찬가지다. 무얼 먹느냐는 너와 나의 공감대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주변에 비건 혹은 베지테리안 친구들이 종종 있다. 아무리 말이 잘 통하고 같이 놀면 즐거워도, 이 친구들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 존재한다. 갓 튀긴 따끈한 치킨에 맥주 한 잔이 땡기는 금요일 밤에 함부로 불러낼 수 없다.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던 프로젝트 마무리 기념으로 꽃등심과 살치살을 조지러 가자고 할 수도 없다. 빵 한 조각을 먹더라도 계란이 들어갔는지 확인해야 한다.  나와 같은 식생활을 갖지 않은 친구라면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쌀밥은 중요하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실 쌀이라는 곡식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을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문화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존재한다. 쌀 소비의 90%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루어진다지만 쌀을 이용한 요리들은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의 빠에야, 이탈리아의 리조또, 미국의 잠발라야, 멕시코의 토마토 밥 등등 모두 쌀을 이용한 요리다. 아시아로 넘어오면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윤기가 촤르르 흐르고 찰진 흰쌀밥은 생각보다 찾기가 힘들다. 자포니카라는 이 품종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북아 지역에서만 주로 소비되며 전체 쌀 품종들 가운데 약 10%만을 차지한다고 한다. 훅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은 장립종 쌀은 볶아 먹으면 참 맛있는데, 이걸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쌀밥을 지어 반찬과 먹는 그림은 영 그려지지 않는다.


나성의 가주마켓 김밥 코너에서 산 오징어 볶음은 내가 찾던 한국의 맛이었다. 초등학생시절 방과 후에 친구들과 천 원짜리 몇 장을 쥐고 찾아간 분식점에서 먹던 그리운 맛. 제육볶음과 오징어볶음 사이 항상 고민하던 10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센 불에서 금방 볶아낸 오징어는 아주 부드러웠고, 양배추와 당근은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었다. 매콤한 고춧가루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달큰함과 참기름의 고소함은 건더기 없이 양념만 따끈한 흰쌀밥에 쓱쓱 비벼 먹어도 만족스러움을 자아냈다. 같이 온 단무지와 김치, 장국은 단촐하지만 없으면 섭섭할 분식점의 매력둥이들이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 맞는 것 같다. 곧 한 달 동안 한국에 방문한다. 벌써부터 맛있는 밥을 잔뜩 먹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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