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HOP
어쩌다 보니 밤을 꼴딱 새웠다. 지난 <느지막이 아사이 볼> 에피소드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내 수면 패턴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어제는 저녁을 먹고 솔솔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여덟 시쯤 침대에 누웠더니 깜빡 잠이 들어 밤 열 두시 경 일어나 버렸다. 어떻게든 다시 자보려고 불은 켜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양을 세 보았으나, 네 시간 푹 자고 일어난 뇌는 너무나도 말똥말똥한 것이 핸드폰을 켜고 인스타든 유튜브든 무엇이든 재밌는 걸 보라고 유혹을 하더라. '아니 멍청이 뇌야, 너 자야 한다고'라고 조용히 외쳐 보지만 손은 자연스럽게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나마 나름대로 시각적 자극은 없으니 수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오디오북을 켰다. 뭔가 한 밤중에 책을 읽는 지금 내 상황과 제목이 꼭 맞는 것 같아 고른 매트 헤이그 작가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잠이 든 것도 안 든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로 책이 인도하는 판타지 세계로 빠져들었다. 살에 닿는 이불의 보드라운 촉감에 괜스레 몸을 더 비비적거려 보았다. 적당히 무게감 있는 폭신한 이불이 내 몸을 감쌌다. 꼭 팬케이크를 덮고 누운 기분이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새벽 4시, 배가 고플 시간이다. 이대로 잠을 자기는 글렀다는 판단이 섰다. 이번엔 구글지도를 열었다. 아침 일찍 여는 음식점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검색한 끝에 아침 7시부터 영업을 하는 마음에 드는 다이너 카페를 찾았다. 빨리 7시가 되어라 외치며 이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차를 타고 나오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야외 테라스에서 따뜻한 햇볕 아래 여유롭게 아침을 즐기며 글도 쓰고 책도 읽을 요량으로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서 나왔는데,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없나 보다. 야외 다이닝이 안되더라도 실내에서 먹으면 되지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으나 주차가 문제였다. 아무리 뱅글뱅글 동네를 돌아봐도 식당 근처는 스트릿 파킹은 제한이 겨우 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멀리 주차를 하자니 비도 오는데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한참을 걷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그럼 어떡하나 다시 구글 지도를 켰다. 이 동네 주변은 다 주차가 마찬가지 문제일 테고, 어디 멀리 가자니 딱 출근시간에 온통 붉은색으로 표시되는 교통 체증을 뚫고 갈 자신이 없었다. 메뉴를 바꿀까 하다가도 밤새도록 군침을 흘려가며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을 돌렸던 팬케이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의미 없는 스크롤링을 하다 그냥 다시 집에나 갈까 싶을 무렵 뇌리를 스친 한 단어 IHOP. International House of Pancakes의 줄임말이니 네 단어라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 김밥천국 느낌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만만하고 무난한 프랜차이즈 식당. 펜케이크가 너무 간절할 때 여기보다 좋은 곳이 더 있을까?
이미 도착하기 전부터 뭘 먹을지 다 정해 두었지만 그래도 메뉴를 보는 재미가 있으니 잠시 음식을 고르는 척을 했다. 식당 이름만 봐서는 펜케이크만 팔 것 같지만, 오믈렛, 와플, 크레페, 버거 등 다양한 메뉴들이 있다. 실제로 2018년에 잠시 이름을 P를 거꾸로 뒤집은 b로 IHOb (International House of burgers)로 바꿔 아침식사에 국한된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메뉴를 구경하는 사이 나온 커피를 한 잔 쭈욱 들이켰다. 주전자째로 내주는 갓 뽑은 커피는 사실 그냥 평범하디 평범한 다이너 커피다. 적당히 쓰고 적당히 고소하고 산미는 거의 없는. 하지만 뭔가 은색 주전자에 담겨 나와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진다. 밤을 꼬박 새웠으니 무제한 리필이 가능한 다이너 커피는 최고다.
노트북을 켜고 글을 잠시 써 내려가고 있으니 내가 주문한 음식들이 금방 서빙되었다. 레몬 리코타 블루베리 팬케이크와 써니 사이드 업 두 개, 베이컨, 해쉬 브라운. 팬케이크 시럽 종류도 테이블마다 네 개씩 기본으로 있는데, 올드 패션, 블루베리, 버터 피칸, 스트로베리가 그것이다. 역시 음식은 한 가지 맛만 나면 재미가 없다. 레몬 리코타 팬케이크에는 레몬즙을 더 추가로 짜 먹을 수 있게 레몬 조각이 하나 나온다. 달달한 팬케이크에 올라가 있는 꾸떡 하고 고소한 리코타 크림 위에 레몬즙을 추가로 뿌리면 상큼함이 배가 된다. 누가 생각했는진 몰라도 너무 달기만 한 것보다 훨씬 맛있잖아. 후추를 톡톡 뿌린 계란 노른자를 터뜨려 간이 잘 되어있는 해쉬브라운을 찍어 먹으면 따로따로 먹는 것보다 두 배로 맛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바삭한 베이컨에 버터 피칸 시럽을 쪼로록 뿌려주면 단짠의 조합이 혀의 미각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한다. 힙하고 트렌디한 카페는 아니지만 어쩜 이리 만족스러울까. 수 십 년 동안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IHOP은 65년 전인 1958년 이곳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외곽의 버뱅크라는 도시에서 처음 출발했다고 한다. 혹시나 오리지널 로케이션이 남아있을까 싶어 검색을 해봤더니 안타깝게도 그곳엔 현재 Mendocino Farms라는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파는 다른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들어와 있다 (이곳의 치미추리 스테이크 샌드위치와 두부가 들어간 비건 반미는 정말 맛있다). 그래도 다행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지점들은 여전히 파노라마 시티와 볼드윈 힐즈에 남아 있다고 하니 언젠가 한 번쯤은 방문해 볼 만한 것 같다. 현재 전 세계에 1,841호점까지 있다는데 이 오리지널 지점들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IHOP 로고를 보면 동글동글한 O와 P로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들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주변 테이블들을 둘러보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손님들의 얼굴도 하나 같이들 웃고 있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공간에선 나도 괜히 더 즐거워진다. 그렇게 실컷 글도 쓰고 책도 읽으며 여유롭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즐기고 집에 돌아왔다.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불러서 그런지 노곤노곤해져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폭신한 게 역시나 펜케이크를 뒤집어쓴 느낌. 뭔가 다시 펜케이크가 당기는 것도 같고... 펜케이크와 이불의 무한 굴레에 빠져버린 것 같다. 내일 바로 다시 IHOP을 방문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