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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땡땡 Jun 21. 2023

친절함과 오지랖 사이 데니쉬 샌드위치

@Open Face Food Shop

실내 암벽 등반을 시작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하지만 꾸준하지 못했던 탓에 여태 그레이드 V2-3에 머무르며 초보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체육관에 사람이 많은 날에는 쉬운 문제에서 낑낑대는 나를 모두들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움츠러들고는 한다. 그저 자격지심일 뿐이라며 스스로 다독여 보기도 하지만, 볼더링은 클라임과 클라임 사이 휴식이 굉장히 중요한 운동이라 실제로도 벽에 있는 사람들보다 매트에 앉아 다른 클라이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물론 대부분 나 같은 초보보단 흡사 스파이더맨을 연상시키는 고수들을 구경하고는 하지만 말이다. 가끔가다 루트를 못 찾고 헤매고 있으면 손을 어떻게, 발을 어떻게 하라고 외치는 분들이 있는데, 친절하다고 해야 할지 오지랖이 넓다고 해야 할지 항상 기분이 애매해다. 덕분에 성공을 하면 웃으며 "땡큐"라  수 있지만, 실패하면 괜히 코칭을 해준 사람도 나도 어색해져 서로 다른 쪽 벽으로 슬그머니 이동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같이 클라이밍을 다니는 친구도 나와 같은 소심쟁이다. 볼더링 벽에 사람이 너무 많다 싶으면 언제나 로프 클라이밍을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한다. 로프 클라이밍은 맨몸으로 비교적 낮은 높이의 벽을 오르는 볼더링과는 다르게 로프를 이용해 40ft (12m), 약 아파트 4층 높이의 벽을 등반하는 것이다. 천장에 이미 고정되어있는 줄을 따라 올라가는 탑 로프 클라이밍과 본인이 직접 줄을 갖고 중간중간 보이는 고리에 고정시키며 진행하는 리드 클라이밍, 이렇게 두 가지 종류가 있지만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는 혹시라도 떨어질 경우 낙폭이 훨씬 더 큰 리드 클라이밍은 아직까지 도전을 못하고 있다.


볼더링 벽과는 다르게 이곳 루트들엔 이름이 붙어있어 그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난', '역경' 등 보기만 해도 섣불리 도전하기 두려워지는 무시무시한 이름부터 '유니콘의 꿈', '무지개 구름' 같은 귀여운 이름들과 '삼각형 문', '붉은 책'처럼 의미심장한 이름들까지 아주 다양하다. 이 날 내가 있던 벽은 '라멘', '모찌', '맥 앤 치즈', '프라이드치킨', 그리고 '버거 & 비어'에 이르는 동서양 대통합의 음식 벽이었다. 음식 이름들을 한참 보고 있자니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시간도 마침 12시. "버거?" "좋아."라는 두 마디의 대화로 친구와 나는 버거를 찾아 체육관을 나섰다.


버섯이 잔뜩 올라간 파머스 마켓 오픈 샌드위치

우리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음식점에 들리는 걸 좋아한다. 무슨 메뉴를 파는지도 모르는 채로 찾은 곳에서의 두근거림은 오랜 검색 끝에 어렵게 찾아간 맛집에서는 느낄 수 없. 작년 이맘때 동네를 배회하다 찾은 Open Face Food Shop. 덴마크 음식을 파는 곳인데 맛있어서 몇 번 방문을 했으나, 어느 날은 휴가, 어느 날은 프라이빗 이벤트, 어느 날은 폭우로 인한 휴업 등 계속해서 실망만 하고 돌아와야 했다. 오랜만에 데니쉬 버거는 어떻냐는 친구의 제안에 1년 만에 그곳을 다시 방문했다.


낮은 게이트를 열고 들어가 밖으로 난 카운터에서 띵동 벨을 울리면 덴마크 출신의 주인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우리를 맞이해 주신다. "허브 화분이 늘어진 바에 앉으시겠어요? 아니면 작은 정원이 있는 뒤뜰에 앉으시겠어요?" 뒤뜰을 선택하자 "훌륭한 선택이세요! 사실 허브를 얼마 전에 다 수확해서 볼 게 별로 없거든요" 라며 호탕하게 웃으시는데 참으로 유쾌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주 뒤에 새로운 허브들이 들어오니 그때 다시 와서 구경도 하고 집에 따가기도 하라는 친절한 주인아저씨.


"아가씨들 오늘 모닝커피는 드셨나요?" 아니요라는 대답에 "이런 이런! 지금 어떻게 활동하고 계시는 거죠?"라고 반응하는 아저씨의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났다. Hakke Bøf라 불리는 데니쉬 버거를 먹으러 찾은 곳이었으나, 재철 버섯이 잔뜩 올라간 파머스 마켓 토스트는 어떻냐는 아저씨의 강력 추천에 홀라당 넘어가버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주문을 넣고 돌아온 아저씨는 식물들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울타리를 따라 서있는 화분들로 손짓했다. 아저씨는 다양한 종류의 고추들을 기르고 있었다. 나무의 모양새가 뱀과 닮아 이름 붙었다는 Black Cobra Pepper부터 누가 칠해놓은 듯 영롱한 보랏빛의 Purple Jolokia Pepper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고추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이름을 가르쳐주며 그 맛과 향에 대해 설명해 주는데, 암장의 오지라퍼들과의 차이가 뭘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둘 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는데도 본인이 아는 것을 이야기해 준 것까지는 같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달랐다. 오지라퍼들의 참견은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질 것도 아니면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욕심임에 반해, 덴마크 주인아저씨의 친절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 전달일 뿐이었다.


그렇게 고추들을 구경하던 중 나온 우리의 샌드위치. 가장 위에 있던 느타리버섯을 먼저 먹어보았다. 고소한 버터의 풍미가 입안을 감싸고 뒤따르는 풍부한 버섯 향, 그리고 상큼한 레몬즙이 혀에 닿자 이게 싱그러움이지 싶었다. 그다음엔 바삭하게 구워진 사워도우 브레드와 함께 브로콜리와 버터 스쿼시를 한 입. 시큼한 사워도우는 입맛을 돋아주고 아삭한 채소들은 식감의 재미를 더해준다. 사실 나는 치즈를 좋아하지만 향에 민감한 편이라 오래 숙성되었거나 우유가 아닌 다른 동물의 젖으로 만든 치즈는 즐기지 못한다. 하지만 얇게 펴 발려 있는 고트 치즈 스프레드와 사워 도우의 조합이 꽤나 괜찮았다. 콤콤함이 지나치다 싶으면 비트 피클을 한 조각 썰어 입가심을 해주면 된다. 덴마크에서는 북유럽의 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많은 채소들을 피클로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우리나라 장아찌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입맛에 잘 맞는다. 새송이버섯, 목이버섯, 표고버섯 들이 입안에서 펼치는 작은 가든 파티에 다시 오길 참 잘했다 싶었다.


일반 샌드위치의 경우, 주인아저씨의 말마따나 첫 입을 베어 물었을 때는 참 맛이 있다. 부드럽거나 혹은 바삭하거나 한 빵 속에 들어간 다양한 재료들이 얼른 다시 한 입 먹으라며 유혹을 한다. 하지만 먹다 보면 처음과 계속해서 똑같은 조합들로 먹을수록 맛의 감가상각이 커지게 된다.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쯤에는 그저 후다닥 간편하게 한 끼를 때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뭐 샌드위치의 역사가 포커를 치며 시간 낭비 없이 손으로 들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에서 시작이 됐으니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나? 하지만 위에 빵이 하나가 없는 오픈 페이스 샌드위치라면 말이 달라진다. 포커 중독 샌드위치 백작은 식겁을 하겠지만, 우아하게 칼과 포크로 잘라 원하는 재료의 조합으로 매번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오픈 페이스 샌드위치는 좀처럼 쉽게 질리지 않는다. 그렇게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디저트를 하겠냐는 주인아저씨에게 오늘은 배가 너무 부르다는 대답을 하고 가게를 나서는데, 지친 기색이 여력 한 친구가 조심스레 저렇게 말 많은 분들은 너무 부담스럽다 토로하더라. 나도 보통 때라면 공감을 했을 테지만 오늘따라 아저씨의 친절이 참 좋았다. 나이가 들 수록 점점 화만 늘고 삶은 팍팍해지는데 잠시나마 미소 지을 수 있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정이 느껴지는 덴마크 아저씨. 타지에서 나누는 따뜻함에 오늘 하루 힘을 내어 나아갈 원동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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