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계속 엘에이 답지 않은 날씨에 기분이 자주 꿀꿀하다. 엘니뇨 때문이라는데,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웠던 현상이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줄이야. 이 도시 최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날씨가 이 모양이니 내가 여기 왜 살고 있나 하는 의문까지 들 지경이다. 이곳 10년 차 주민으로서 내가 느끼는 엘에이는 사실 그렇게 예쁜 도시는 아니다. 어쩌다 몇 년에 한 번씩 엘에이를 방문하는 친구들은 야자수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코리아타운을 걷다 마주치는 야자수들은 얇디얇은 몸통으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것이 마치 이 낯선 땅에 홀로 자리 잡고 살아가는 나 같아서 기분이 언짢아진달까?
<라라랜드>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데이트를 즐기던 엔젤스 플라이트를 타러 다운타운에 가면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건 역한 오줌 찌린내. 거리거리 즐비한 노숙자 텐트들. 그리고 너무나도 흔한 캣콜링. 베벌리 힐스 로데오 거리 명품샵들을 둘러보는 관광객들은 모를 도시 전체에 드글거리는 바퀴벌레들. 집 근처 산책을 할 때는 반드시 땅만 보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바퀴벌레 혹은 개똥이 어디에 지뢰 잡고 있을지 모른다. 가끔은 이 도시 전부 젠트리파이 됐으면 좋겠다는 엄청난 생각을 하고는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쫓겨나겠지. 하지만 가난을 혐오하고 모른 척하는 잔인함 뒤에 숨어 자본주의의 쾌락을 만끽하며 살면 편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아등바등 버텨야 한다. 성공해야만 한다. 가슴이 턱 막힌다.
가끔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 엘에이는 도시가 너무도 넓게 퍼져있어 딱히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이랄 것도 없고, 어딘가를 가려면 무조건 차를 타고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해야만 한다. 목적지 없이 발걸음 닿는 대로 방황할 수 없다. 그래서 꼭 갇혀버린 느낌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구글 지도를 켜놓고 엘에이 도시 구석구석 괜히 확대했다 축소했다 혼자 온갖 난리를 치다 보면 역시나 갈 곳이 없다는 결론이 난다. 물론 혼자서도 트래픽 속에 1-2시간씩 갇혀있는 게 괜찮다면 주변에 다녀올만한 곳은 꽤 있지만 그랬다간 성질만 더 더러워질 것 같은 기분에 빨갛게 교통체증 현황이 표시된 지도를 닫는다.
결국 제일 만만한 곳은 쇼핑몰이다. 내가 제일 자주 찾는 두 곳은 바로 라 브레아 지역에 위치한 더 그로브와 센츄리 시티 지역에 위치한 웨스트 필드 몰이다. 두 군데 다 야외 쇼핑몰로 해가 좋은 날엔 굳이 쇼핑을 하지 않더라도 아름답게 꾸며놓은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책을 읽기도 좋다. 특히 더 그로브 같은 경우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더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과 함께 인터넷에서 자주 등장하는 엘에이 대표 관광명소 중 하나인데, 집에서 더 가까워 더 자주 찾는 편이다. 대표 관광명소 치고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은데, 가볍게 기분 전환용 산책을 하기엔 딱이다.
(좌) 포테이토 피자 (우) 카프레제 샐러드 + 말차 라떼
오늘도 아침부터 꾸리꾸리한 날씨에 이 기분 나쁜 감정을 대체 어찌해야 하나, 침대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더 이상 온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있질 못하겠어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어제 입었다 벗어 놓은 옷을 고대로 다시 주워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역시나 하늘은 회색빛. 그저 내 아파트가 해가 잘 안 들어 어두컴컴하지 실제로 밖은 환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괜히 애꿎은 차고 리모컨에 화풀이를 했다. 항상 이런 날씨의 시애틀에 사는 친구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날이다. 앞에서 꾸물럭 꾸물럭 세월아 네월아 기어가는 차에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며 겨우 겨우 더 그로브에 도착했다.
주차 타워를 나오자마자 시원한 물줄기를 뽐내는 분수에 뭔가 탁 트이는 기분. 2020년 봄, 한창 코로나로 도시 전체에 외출자제령이 내렸던 시기, 24시간 내내 집에만 박혀 있자니 미쳐버릴 것 같아 일주일에 한 번씩 코에 바람을 쐬러 더 그로브에 들리곤 했었다. 옷 가게와 음식점들은 모두 영업을 하지 않아 아무도 없는 한산한 쇼핑몰에서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분수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꼭 재난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곤 했다. 당시 코로나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희한하게 그 분수가 그렇게 위안이 됐었다. 아무튼 오늘은 브루노 마스 노래에 맞춰 춤추는 분수를 뒤로하고 더 그로브 몰 구석에 위치한 Chill Since 1993 피자 가게로 향했다. 노란 꽃길을 지나 골목 끝에 도착하면 힙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공룡 로고가 그려진 벽이 보인다. 괜스레 웃음이 나게 생긴 친구다.
사실 가게 이름에 속기 쉬운데, 이 피자 가게는 20년 유구한 전통의 이탈리안 음식점이 아니다. Chill Since 1993는 Brandy Melville 패션 브랜드에서 인기가 많던 티셔츠 라인인데, 이 타이틀을 갖고 같은 브랜드에서 2021년 피자 가게를 런칭한 것이다. 사실 나는 브랜디 멜빌을 영 탐탁지 않게 여겨한다. 8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출범한 이 패션 브랜드는 2000년대 말 미국에 진출을 하며 마치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레지나 조지가 입을 것만 같은 이 옷들로 미국 청소년들의 마음을 휩쓸었다. 하지만 브랜디 멜빌 옷들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사이즈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산의 효율성과 환경을 생각해서 원사이즈만 출시한다는데, 특히나 몸매의 다양성이 많은 미국에서 누구를 위한 원사이즈인지... 피자 가게 한쪽에서도 Chill Since 1993 로고가 그려진 옷들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피자를 팔면서 원사이즈 옷만 판다니, 위선자들도 이런 위선자들이 있을 수 없다.
원래는 피자 하나만 시키려고 했는데 막상 메뉴를 보니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행복한 고민에 이르렀다. 아루굴라 프로슈토는 내가 항상 좋아하는 메뉴고, 스파이시 소프레사도 맛있을 것 같고, 말랑 쫄깃 부라타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도 땡기는 것 같고... 나는 혼밥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 내공을 차곡차곡 쌓아왔는데, 그럼에도 혼밥이 아쉬울 경우는 바로 오늘처럼 여러 가지 메뉴를 다양하게 시켜서 조금씩 먹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다. 고심 끝에 포테이토 피자와 카프레제 샐러드, 그리고 아이스 말차 라떼를 주문했다. 야외 테이블에 나와 앉으니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기분이 좋아졌다. 오래전 사놓고 책장에만 묵혀두었던 책을 꺼냈다. 햇볕이 너무 강한 날엔 종이에 반사된 빛에 눈이 아팠었는데, 흐린 날씨가 밖에서 책을 읽기는 더 좋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곧 음식이 나왔다. 샐러드는 만들어 둔지 오래됐는지 야채들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굉장히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카프레제의 핵심인 모짜렐라와 토마토는 맛있게 먹어치웠다. 얇게 저민 감자가 켜켜이 쌓인 피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후후 불어가며 크게 한 입 바사삭. 로즈마리와 오레가노, 올리브유 향이 서로 잘 어울리고, 알싸하게 끝맛을 잡아주는 후추도 아주 좋았다. 순식간에 한 조각을 해치우고 진한 말차 라떼를 쭈욱 들이키니 그 달달함에 아침부터 우중충했던 기분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하더라. 두 번째 조각엔 페페론치노와 파마잔 치즈를 듬뿍 뿌려 먹었는데, 아무것도 안 뿌렸을 때가 감자 본연의 맛이 더 잘 느껴져 좀 더 내 취향에 가까웠다. 두 조각을 먹으니 배가 불러 다음번엔 친구랑 와서 나눠 먹어야지 생각하며 남은 피자와 샐러드를 포장했다. 집에 가는 길 하늘엔 역시나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는데, 뭔가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맛있는 걸 먹어줘야 해라며 라디오를 틀자 내일은 날씨가 오랜만에 맑다고 한다. 우중충한 엘에이의 마무리가 잘 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