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눈을 떠보니 시계는 벌써 낮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프리랜서의 저주이자 축복, 심하게 불규칙한 수면패턴. 어제도 새벽 5시가 다 되어 알람도 안 맞추고 잠든 것 치고는 적당한 때 일어났달까. 핸드폰을 켜자 보이는 삼성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알림, 친구의 카톡, 그리고 "그럼 이따 7시에 레스토랑에서 봐 :)"라는 오늘 데이트하기로 한 남자의 문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귀찮다... 였다.
침대 누워 불도 켜지 않은 채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젯밤에 샤워를 했는데 오늘 또 해야 하나? 해야지 그래도 첫 데이튼데. 화장은? 원래도 잘하지 않으면서 고민하는 척은. 약속 장소는 집에서 불과 15분 거리. 그렇다면 최소 5시 30분에만 준비를 시작하면 된다. 그다음 문제는 밥. 일어난 지 얼마 되지않아 지금 점심을 먹기에는 입맛이 전혀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먹고 7시까지 버티자니 배가 너무 고플 것 같고, 애매하게 3-4시쯤 먹었다간 저녁을 못 먹을 테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져버린 수면패턴에 괜스레 짜증이나 머리를 박박 긁으며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입시를 했던 수험생이라면 만성 수면부족으로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대학을 미국으로 와 가장 놀랐던 건 11시면 자는 친구들이 지천에 널렸다는 것이었다. 평균 취침 시간 새벽 2시, 하루 대여섯 시간의 수면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게 적응된 전직 한국 고딩에게 최소 여덟 시간의 수면 확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미국 대학 새내기들의 이야기는 그저 처음 듣는 언어마냥 이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나와 같은 친구들도 많았고, 일찍 자는 친구들도 주말에 파티를 하거나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를 할 땐 꼭두새벽까지 깨어있긴 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별 일이 없는 경우 자정을 넘기는 일이 드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사이 + 치아 푸딩 베이스
이렇게 수면패턴이 엉망이다 보니 나는 아침을 먹는 일이 거의 드물다. 대학 4년 내내 아침을 먹은 기억은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학교 식당은 오전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아침 식사를 운영했는데, 시험기간에 아예 밤을 새우고 가지 않는 이상 저 시간을 맞추기란 나에게는 기적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말을 좋아했다. 주말엔 브렉퍼스트 대신 브런치로 운영이 되어 오후 1시까지 아침 메뉴를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늦잠을 실컷 자고도 먹을 수 있는 아침이라니!
나는 아침 메뉴를 참 좋아한다. 포슬한 스크램블 에그와 짭짤한 베이컨, 입 안에서 바사삭 재미나게 부서지는 해쉬브라운. 갓 구운 따끈한 와플에 치킨텐더를 올려 메이플 시럽을 부어먹으면 단짠의 최고 조합. 할라피뇨와 올리브, 시금치, 토마토를 잔뜩 넣은 오믈렛도 좋고, 에브리띵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종류 별로 발라먹으면 그건 또 얼마나 맛있는데. 이 수많은 아침 메뉴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바로 아사이 볼이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꽤나 대중화 된 메뉴인데, 10년 전 처음 먹어본 아사이 볼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당시 나는 아사이가 뭔지도 몰랐으나 시원하고 상큼하고 달콤하고 입맛을 돋아주는 이 매력적인 음식에 푹 빠져버렸다. 더군다나 내 마음대로 토핑을 뿌려먹는 재미까지 있단 말이지. 다양한 조합을 시도해본 결과 제일 내 취향으로 아사이 볼에 빠져선 안되는 토핑들은 카카오 닙스, 고지 베리, 그리고 아몬드 버터 듬뿍이다. 하지만 은근히 이 세가지 토핑이 모두 있는 가게를 찾기가 힘들다.
오랜 방황 끝에 찾은 곳은 바로 Roots & Rye. 패서디나에 두 곳, 에코 파크에 한 곳이 있는데 내가 주로 방문하는 곳은 에코 파크 지점이다. 가게도 굉장히 작고, 코로나 이후로 한 번에 한 팀씩만 안에 들어갈 수 있어 가끔은 웨이팅이 굉장히 길어지지만, 그래도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 이곳에선 알록달록 아름다운 무지개 볼을 먹을 수가 있거든. 여기엔 자주색의 기본 아사이 스무디 말고도 베이스 종류가 다양하다. 파인애플, 망고, 코코넛, 스피룰리나가 들어간 하늘색 블루 매직부터, 말차 가루가 들어간 초록색 베이스, 용과가 들어간 분홍색 베이스, 그리고 하얀 치아 푸딩과 노란 오버 나잇 오츠도 선택할 수 있다. 가장 큰 사이즈 볼에 모든 베이스를 차례로 담으면 무지개 볼 완성!
욕심을 부리고 싶지만 저녁 약속이 있으므로 가장 작은 사이즈 볼을 사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테이블 두 개. 누가 먼저 앉을 새라 후다닥 자리를 잡고는 급하게 한 입 떠먹으려다, 이제부터 브런치에 글을 쓸려면 사진을 찍어 둬야겠구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평소 SNS도 잘하지 않기에 뭔가 음식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자체가 민망해 무슨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조심조심 행동하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났다.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회색빛이었는데, 그마저도 운치 있게 느껴지더라. 최근 몇 달 프로젝트 마지막 마무리를 향해 달리느라 딱히 하늘을 올려다볼 겨를이 없었다. 오랜만에 느지막이 먹는 아사이 볼이 주는 여유에 몸을 맡겨보았다.
그렇게 아사이 볼을 하나 먹고 저녁 데이트를 나갔다. 배고프냐는 상대방의 질문에 점심으로 아사이 볼 하나밖에 안 먹어 잘 먹을 수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이 친구가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라. 엘에이 토박이라면서 아사이 볼을 모를 수가 있나 싶어 "아사--이" "아사--이"하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별안간 이 친구 머리 위에 느낌표 열 개가 그려지더니 "아.사.이."라고 발음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말로 음절마다 스타카토 찍어서 "아.사.이." 라고??? 10년 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침 메뉴를 잘못 발음하고 있었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여태까지 그 수많은 음식점들에서 엉뚱한 주문이 들어가지 않은 게 기적이었군 싶다. 그래도 친구 중에는 "아카--이"라고 발음하는 친구도 있으니 뭐 나는 그나마 좀 가까웠다고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