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기사 입문기

by 박소연



나는 여성 시내버스 기사였다.

아주 우연찮은 기회가 나에게 생겼다.

강원도 속초에 살면서 두 아들의 장래와 미래를 위해 서울살이를 택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마자 아파트 상가 분양을 받아 수입코너 하던 것을 그대로 놔두고 부랴 사랴 급하게 상경했다.

물건값이 고스란히 손해로 남았지만 아까운 줄 모르고 좀 더 늦으면 아이들의 전학이 어려울 거란 얘기에 과감히 모든 걸 포기하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남편과 아이들이 출근하고 등교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일 없이 시간만 보냈다.

심심하고 무료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됐지만 운전학원을 다녀야 하겠단 생각으로 1종 보통면허라 대형 면허를 따보고 싶단 생각에 무조건 접수를 했고 거기서 나보다 서너 살 적은 동생뻘 되는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 여자 남편 동료의 아내가 시내버스 기사를 하고 있다며 나한테도 하고 싶으면 연락 하라며 연락처를 주었고 받았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시내버스 운전을 하게 되었고 큰아들이 41살이 되도록 했다.

내가 처음 버스 기사를 할 90년대 초만 해도 여자 기사가 흔치 않아 승차를 하거나 길 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신기한 듯 쳐다봤고 멋있다고 부러워했다.

날씬하고 곱고 예뻤던 시절 나의 전업 주부의 시절을 끝내고 자신감 넘치게 과감하고 당당해지고 있을 때 선택한 나의 직업은 상상하지 못할 기막힌 사연과 가슴 시린 사연, 즐겁고 재밌는 사연, 등등 많은 시간 내가 겪은 많은 사연을 경험하며 삶을 이어 나갔다.

그때만 해도 짓궂은 남자 승객들은 실없는 관심으로 한 마디씩 했다

남편이 있냐고~!! 있다 했다. 오지랖 넓게 뭐 하느냐 묻는다. 이런 식의 쓸데없는 궁금증에 일일이 대답하기 식상해서 나중엔 심술부리듯 집에서 살림한다 했다. 시집 잘못 왔다고 비아냥했다.

대꾸 안 했다.

그런데 97년 IMF가 오고 나니 남자들의 말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사님 남편분께서 행복하시겠어요. 부럽습니다"한다.

예? 왜요? 물었다. 자기는 명퇴를 했는데 아내에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 출근하는 척 매일 나오기는 하는데 갈 데가 없어 답답하다 했다.

위로금 몇 푼 더 받고 명퇴했지만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 하는 건 자기 아내는 평생 자기가 벌어다 줘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른다 했다.

그래도 말을 하고 의논을 하셔야지 오전인데 술을 드시고 속상해하면 더 힘들지 않겠냐 했더니 자기 아내를 생각하니 우리 남편이 너무 부럽단 거였다. 이렇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울 남편도 내가 버스를 한다 할 때만 해도 설마 하겠냐 했지만 막상 견. 실습 끝나 발령받고 나니 뚱딴지 같이 겁대가리 없는 협박을 해댔다.

마누라가 운전하는 거 불안해서 절대 못 산다며 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렸다.

무슨 소리냐 발령받았는데 끝까지 하겠다 했더니 간이 배밖으로 출장 나오는 소릴 해댔다.

"이혼해 "였다. 말을 안 듣고 고집을 부리니 이혼이란 말을 쉽게 내뱉으며 협박했다. 그래서 깊게 생각 안 하고 결정했다. "그래. 이혼해" 생각해 보니 이혼해도 버스 운전으로 혼자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고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 너무 좋았다.

이렇게 반대하는 남편의 고집을 꺾고 시작한 직업이 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게 한 일등공신은 IMF였다.

이젠 안 한다 할까 봐 걱정하는 남편의 눈치를 알아챘고, 이혼 얘기는 쑥 들어가고 포기를 했지만, 이젠 친정

엄마가 난리였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거나 편안히 먹고살지 왜 버스 운전이냐며 못하게 했다.

친정에 안 갔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 연락도 안 했다. 이렇게 고집부리며 시작한 버스 운전이 평범한 사람이

평생 겪지 않아도 될 별의별 사건을 28년 동안 난 많이도 경험하고 다 겪었다.

책으로 엮어도 남을 만큼의 희로애락이 나를 강하게 했다. 이제부터 버스 기사로서 또한 여자로서 경험한 많은 사연을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공 감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제1장 버스기사 입문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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