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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Jul 16. 2023

네가 괜찮으면 세상도 괜찮은 거야

안나 카레니나



내가 무한한 공간에 대해 알고 있다 해도, 내가 견고하고 푸른 천구를 보고 있다면, 난 분명 옳은 거야. 그 너머를 보려고 안간힘을 쓸 때보다 더 옳은 거지.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의 소설은 너무 두꺼웠다. 사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소설집필을 관두고 명상으로 얻은 깨달음을 엮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라는 책을 읽고서 그의 장편소설도 읽어볼 엄두를 낼 수가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가의 몇 편의 단편 말고 세 권으로 나눠진 두꺼운 벽돌책을 시작할 때는 이걸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도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대체 얼마동안 이 두꺼운 책을 썼을까. 

 나는 사실 톨스토이 작가에 대하여 더 궁금했다. 소설은 그의 생각들을 샅샅이 염탐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던 터라 안나 카레니나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안나라는 매력적인 여성의 불륜 스캔들, 하지만 그녀의 삶에 불을 지핀 그 사랑도 결국 시간과 사람의 손을 타서 낡아져 버리는 과정에서 그녀의 불안한 생각과 감정들이 전개되는 과정은 매우 안타까웠다. 

 대체 사랑이 뭐라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톨스토이는 한 불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여인이 달려오는 기차를 이용하여 자살한 실재 사건을 모티브로 이 이야기를 그려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맛은 주인공 안나의 비극적 마무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의 인물들이 그려내는 심리의 변화를 통해 하나의 사건을 통해 세상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톨스토이의 '생각', 그리고 '인생의 의미'등을 유추하는 과정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었다. 특히나 안나와 브론스키의 파국적인 사랑에 비해 레빈과 키티의 사랑은 밋밋하고 과연 이게 사랑일까 싶을 정도로 맹숭맹숭하다.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에서 안나는 결국 죽고 레빈은 남아 살아가며 깨닫는다. 

 

'내가 과연 무엇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는 없어.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러니 난 살 수 없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레빈은 이웃 노인의 선행을 통해서나 곤충이 건너갈 수 있도록 잎사귀를 대어주는 아주 작은 행위를 통해서도 인생의 의미를 재발견해가고 있었다. 


내가 무한한 공간에 대해 알고 있다 해도, 내가 견고하고 푸른 천구를 보고 있다면, 난 분명 옳은 거야. 그 너머를 보려고 안간힘을 쓸 때보다 더 옳은 거지.'


레빈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날 때도 느낄 수 없던 아빠로서의 부정으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퍼붓는 소나기 속에서 연약한 자신의 아이를 향해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막혔던 의문들이 하나씩 해결되던 순간은 바로 너무나도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이었다. 


'이런 게 믿음이 아닐까? 그는 북받쳐 오르는 흐느낌을 삼키며 두 손으로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한 레빈의 일상의 깨달음의 순간은 로맨스라는 환상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했던 아름다운 안나의 선택과 너무 대비가 된다. 그러니까 안나도 더 살아야 했다. 비록 사랑이 끝나더라도, 혹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 사랑에 비해서는 초라한 사랑이었더라도, 살다 보면 미미한 사건들을 통해 삶의 의미와 기적을 재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망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래, 실제로 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망했다는 것은 내 생각이다. 사랑이 끝났다는 것도,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는 것도 순전히 안나의 판단이었을 뿐이다. 삶은 길고 사람은 변하고 사건은 그저 일어나고 끝날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사건에 있지 않다. 그것을 살아가는 과정, 그중에 내 인식의 변화에 있다. 

 불행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만큼의 여유, 긍정, 유머 이런 것들이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는 어두운 삶을 살았던 주인공 지안이 우연히 한 아저씨의 인생을 지켜주게 되는 이야기다. 자신이 살던 음지에서 바라보는 아저씨는 양지에서 햇빛만 받고 자랐을 것 같지만, 그의 삶도 만만치 않다. 아저씨는 음지의 지안을 말없이 응원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인범인걸 알면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아저씨는 말한다.

 “네가 괜찮으면 다른 사람도 괜찮은 거야.”

 그래. 내가 괜찮으면 다른 사람도 괜찮다. 내가 나를 용서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용서하기 마련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한다. 내가 내 인생을 존중하면 다른 사람도 내 인생을 존중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괜찮다고 말해도 내가 괜찮지 않으면 결코 괜찮을 수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꼭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리석을 지도 모른다.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도 없고 다시 태어날 수도 없다. 지금껏 살아온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나 자신'만 아니면 우리는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많은 sns의 잘 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 나보다 돈 잘 버는 후배의 소식은 나를 흔들리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그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니었을까에 대한 의심이 들 수 있다. 

 그럴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환생이 아니다. 인생 리셋이 아니다. 나는 다시 내가 끓여 온 인생의 국에 조금 다른 양념을 개발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대로 괜찮다는 허용을 늘려보는 것이다. 

 지금 내 삶이 너무 초라하다면 그런 나를 허용했으면 좋겠다. 

 단지 지금 당신은 조금의 우회, 조금의 휴식, 조금의 허용이 필요할 뿐이다. 

결국 살다 보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랑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내 삶의 시간 동안 묵묵히 사랑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레빈처럼 말이다. 아니, 톨스토이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난 기적을 찾았고, 날 납득시킬 만한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어. 여기에 기적이,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고 언제나 존재했던, 사방에서 날 에워싼 기적이 있어. 그것을 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야!'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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