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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Jul 13. 2023

인생은 짧다는 기쁜 소식



난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왔어. 하지만 사색은 해답을 주지 못했지. 그 사색은 질문과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않았어. 내게 해답을 준 것은 삶 그 자체였고, 해답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한 나의 깨달음 속에 있었어. 그런데 그 깨달음은 내가 그 무엇으로도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지. 하지만 그것은 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었어. 그것이 내게 주어진 것은 내가 그 어디에서도 그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톨스토이  




 어느 날 놀이터에서 개미들이 열심히 과자부스러기를 나르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끼어들더니 개미 몇 마리를 밟아버렸다. 나는 ‘하지 마’라는 소리를 내어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은 개미들을 바라보았다. 

 “개미는 어떻게 묻어줘야 해?”

 “글세... 무덤을 만들기에도 너무 작다.”

 우리 집 물고기들이 죽었을 때 무덤을 만들어 묻어 주었고, 새가 죽었을 때도 무덤을 만들어 기도해 주었는데, 이 작은 개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무수히 개미들을 밟아 죽인 장본인이긴 해도 그때 나는 한참 죽음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던 시기였다. 그래서 왠지 이렇게 밟혀버린 개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끔은 끝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평온해질 때가 있다.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간의 숙명이 나에게 주는 위안이 있다. 나도 나이가 먹은 탓일까. 






 기차를 타고 오던 어떤 날이었다. 인생의 작은 풍파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결에 바라본 창밖 풍경이 잔잔히 흘러갔다. 그리고 이름 모를 역에 정차했다. 흐르던 장면이 정지되자 눈에 띈 것은 건물들 위로 솟아난 거대한 불상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작은 십자가들이 보였다. 세상의 소란 속에서 부처는 가부좌를 튼 채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에 보이는 십자가마저 묵묵히 세상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몇 차례의 크고 작은 풍파들을 지나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선 기차 안에서 나는 내 마음과 관계없이 고요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떤 것에도 끝이 있음을 떠올렸다. 풍파도 잦아들다 소멸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지겠지. 그때는 이런 풍파 따위 감정의 너울 따위 아무것도 아니겠지. 모두가 영원하지 않은 삶을 사는 중이라는 건 작은 위안이었다. 모두에게 영원한 건 없다는 그 명제가 위안이 되던 날, 문득 해방이 보였다.

 하지만 해방은 억압에서 온다고 했던가. 기쁨은 슬픔에서 오고, 행복은 고통에서 온다. 삶을 알아갈수록 새로운 공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증명한 공식은 여기까지다. 영원한 것이 없는 인생의 파도에는 언제나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오간다. 그 사이에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 출렁임이 언젠가는 끝이 나고, 그 출렁임도 어느새 사라지는 물거품이라는 것이다. 



 ‘아등바등 살지 마. 너무.’



 한껏 예민해있던 나에게 속삭였다. 

 ‘슬픈 일이 있다고 너무 슬퍼지도 말고, 기쁘다고 해서 너무 기쁘지도 말자. 잘 살기 위해서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마. 삶은 아등바등하기엔 아까우니까.’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죽음을 떠올릴 필요까진 없지만, 가끔은 이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평온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나의 길었던 인생도 한 점으로도 그어지기 어려울, 개미보다 더 작은 무덤 안에 갇힐지도 모른다. 지금 나의 이 희로애락도 아무것도 아닌 때가 온다. 그래,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비상한 계획도 신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창대한 길을 인간이 어떻게 가늠할까. 나는 살면서 후자의 길을 신뢰하게 되었다. 고통으로만 가득한 길은 없었다. 비록 터널에 갇힌 그 순간에는 사방이 막혀 두렵고 갑갑하겠지만, 분명 우리는 그 길을 나오는 날을 맞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터널은 존재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날, 우리는 영원히 터널을 벗어날지도 모르겠다. 



 다시 우는 날이 오겠지만 그래도 살아내고 있다. 울면서 웃으면서 나는 살아냈다. 모르면서 배우면서 살아냈다. 살아내는 것, 그것 이상으로 삶에서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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