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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Jul 11. 2023

뒤돌아가지 않을 용기만큼

퇴사하기와 분홍수영복 입기

하지만 자네는 그 애를 여성작가라고 생각하겠지? 전혀 그렇지 않아. 그 애는 무엇보다 심장을 가진 여자라고.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퇴사를 결심하고 난 후 부장님이 나의 사표를 수리하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나름 부장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지 나를 붙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지금 일손이 부족하다고, 남아달라고 이야기했으면 나는 마음을 달리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장님은 회사는 내가 없어도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부장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의 안위였던 것이다. 

“괜찮겠어? 나가서 따로 할 일은 있어? “

 그렇다. 내가 퇴사를 결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부장님이 말한 것이 맞다. 나는 나가서 따로 먹고살 일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부장님의 질문은 바로 이런 점을 명료하게 해 주었다. 며칠 전 내 옆자리 팀장님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팀장님은 좋으세요? 지금 직장생활이요.”

S대학을 나온 키가 큰 미모의 팀장님에게 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관계였다. 그럼에도 기다렸다는 듯 팀장님은 술술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만한 자리가 없어. 직장에서 큰 거 요구 안 하잖아. 그냥 자리에서 자기 업무 잘하면 잘리지 않고 평생 일할 수 있잖아. 이만한 자리가 없다. 정말 우린 복 받은 거야.”

 똑 부러진 그녀에게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어쩌면 당시에 나는 답정너였는지도 모른다. 이미 회사에 마음이 떠나버렸는데 다른 사람의 대답하나로 내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마음이 떠났다고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벤츠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가 아닌 전자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 철부지였던 것이다. 

 

 나의 첫 직장을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은 여자 부장님이었다. 짧은 단발, 화장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여타 해서 거절하는 일도,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었다. 언제나 조용히 웃고 나지막이 말했다. 부장님이 하루에 딱 한번 웃을 때가 있었는데 바로 딸과 통화하던 때였다. 딸아이의 밥을 챙기고 학원시간을 확인하는 짧은 전화통화에는 아쉬움과 미안함의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전화목소리만이 내가 유일하게 그녀에게 친근함을 느꼈던 순간이랄까. 

 “왜? 갑자기? 다른 계획이 있어?”

 이유를 묻는 부장님께 대답했다.

 “공부를 좀 더 하려고요.”

 계획은 사실 없었다. 그만두는 것이 첫 번째 계획만이 있을 뿐. 

 그 후 내 삶의 파도들이 밀려올 때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때 더 거창한 계획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더 순탄했을까?’ 

  결과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그때 나를 속이지는 않았다. 그걸로 답을 대신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다시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수영복은 늘 낯설다. 내가 과연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 그 무리에 속할 수 있을까. 일단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수영복을 입기로 했다. 최대한 많이 가려야지. 

 어느덧 검정 수영복에도 적응을 했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날씨에도 적응을 하던 중이었다. 길가에서 늘 마주하던 나무에는 옅은 분홍의 벚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도 봄처럼 화사한 수영복을 입고 싶다.’ 

 토요일이 되자 나는 자연스레 수영복매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점원이 권해주는 수영복을 입어보았다. 연한 푸른빛에 인디언 핑크의 꽃무늬의 수영복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레 카드를 내밀어 결제를 했다. 하지만 막상 수영 강습일이 다가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과연 이걸 내가 입을 수 있을까? 그간 입던 검고 긴 수영복에 비하면 이 분홍 수영복은 너무 파격적인데... 

 나는 며칠간을 두벌의 수영복을 가지고 다녔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새 수영복을 입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어느덧 벚꽃은 졌고 초여름의 푸른 잎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가방 속 검정 수영복을 꺼내어 내 방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수영장에 도착하자 후회막심이었다. 검정 수영복을 챙겨 올걸.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는걸. 하지만 내가 가진 수영복은 단 한벌이었다. 분홍색 새 수영복, 그 수영복을 입고 몇 번을 망설였다. 그리고 얼른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더 깊이 더 오래 헤엄쳤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이제 분홍 수영복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나의 일상복이 되었다. 코로나에도 적응한 인간인데 이게 대체 뭐라고 적응 못할쏘냐. 아무도 나의 수영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나만 혼자 오버였던 것이다.







 직장을 관두던 그날도, 수영복을 입던 그날도, 나에게는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했다. 다시는 회사의 내 자리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이었고, 검정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은 것도 다시는 옛 수영복을 입지 않으리라는 결심이었다. 뒷걸음칠 곳이 없다는 것은 앞걸음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봄이 다시 겨울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떨어진 벚꽃이 다시 피지 않는 것처럼. 때로 삶은 다시 돌아가지 않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살아 있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용기일까. 

 나른한 봄날, 내 삶에 작은 변화를 기다릴 때 내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아주 작은 용기가 아닐까. 

 그 용기가 가져다준 지난날들도 결국 내 인생의 뒤안길로 결국 사라지겠지만. 

 하지만 현재는 죽은 과거를 보내는 사람에게만 존재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게 허락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삭신이 쑤시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니다. 이번에는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용기를 빚을 것인지 내 온몸이 진통하는 과정이다. 그래, 나에게 가늘고 길게는 맞지가 않다. 짧아도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열정이 사람을 더 오래 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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