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몽글 카페 사람들, 해안의 이야기
"어! 규진아. 규진아. 괜찮아."
"아니에요. 앉으세요. 저는 젊잖아요."
규진이는 동아리에서 조용히 활동하던 여학생이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내려온 흑갈색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규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규진이 자리를 뺏고 말았다. 그 상황이 어색해서 얼른 버스가 학교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나보다 규진이는 평화로워 보였다.
"선생님, 어디 사세요?"
"어 나는 연호동, 규진이는?"
"아, 저도 연호동 그 근처에 살아요."
"오, 꽤 멀리 살았구나? 왜 연호고등학교에 안 가고?"
연호동에서 이 동네까지 올 리가 없기 때문에 나는 궁금해졌다.
"아, 이사간지 얼마 안됐어요. 이 학교에 다니려고 엄마가 주소지를 안 옮겼어요. 제가 살던 건물 2층 집에 제가 아직 사는 걸로... 이건 비밀인데... 선생님 아무 데도 말씀하시면 안돼요."
규진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말하지 않을 때는 평화로워 보였던 규진이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럼, 선생님은 생각 외로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 나중에 선생님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해도 아쉬워하지만 마."
규진이는 수줍게 웃었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나름 학군지였다. 새로 생긴 아파트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들 차림새도 단정했고 학생들의 부모도 단정해 보였다. 아침이 되면 검정, 흰색 외제차들이 교문 근처에서 아이들을 내려주었다.
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엄마이겠지. 여유로워 보였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해안은 걸어가기가 싫어 언제나 아이들이 등교하기 훨씬 전에 교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해안에게 김밥 싸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기에 평소보다 늦어버렸다. 규진이와 나란히 버스에서 내렸지만 가벼운 인사를 하고 해안은 있는 힘껏 빠르게 걸었다. 학생도, 그렇다고 선생님도 아닌 자신의 모습이 언제나 낯설었다. 학생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선생님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용납하지 못했다. 이 학교에서 임시로 몇 년 있다가 잘려도 그만이다. 매일 아침 해안은 이를 꽉 깨물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보며 섬뜩했다.
하얗고 검은색 외제차들 뒤로 회색 작업복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고단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뒤로는 김밥을 말고 또 말다가 허리 한 번을 못 펴고 저녁을 짓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 섬뜩했다.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열심히 살아도 허리 한번 펴기 힘든 저녁, 그리고 또 시작되는 아침.
마음을 다 잡아야 했다. 문득 당황하던 규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규진이는 연호동으로 왔을까?'
연호동은 이 동네와 달리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공장들이 많은 연호동은 공기도 안 좋다며 새 동네가 생기는 족족 사람들이 이사를 가버렸다.
'집안이 힘들어진 걸 수도 있지.'
모두 다 언제나 잘 살라는 법은 없지. 모두 다 언제나 가난하게 살라는 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해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늦었다. 머리숱이 없고 바짝 마르고 작은 몸의 교장선생님의 얼굴을 상상하며 있는 힘껏 뛰었다.
'아빠 점심쯤 한 번은 사 먹으라지.'
괜히 심술이 났다. 대체 왜 아빠는 점심을 꼭 싸다녀야 하는 건지 화가 났다. 학생들이 등교하기 삼십 분 전에는 학교 정문을 통과하던 해안이었다. 오늘따라 학생들을 데려다주는 부모님들이 더 많았다. 요즘 학교 옆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번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학생들 틈을 따라 올라가 해안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두꺼운 벽돌책을 올려놓으려고 하는데 '아차' 책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두꺼운 책을 버스에 놔두고 왔나?'
규진이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각자 길을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 책을 놔두고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 안에는 자신이 오늘 동아리 활동에서 하려던 계획들이 쓰여있던 노트가 있었다.
"딩동~ 딩동~ "
그러던 차에 수업을 알리는 벨소리가 학교에 울렸다. 해안도 자신의 자리에 놓인 작은 손거울을 한번 쳐다보았다.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엄마가 첫 출근을 축하하면서 선물해 준 앵두빛 립밤을 입술에 문질렀다. 한층 생기 있어 보였다. 해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에 속도를 냈다. 긴 복도를 따라 뒤편의 건물로 가야 오늘 첫 수업이 있는 2학년 1반 교실에 갈 수 있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햇살이 복도로 비쳤다. 지각한 학생들이 서둘러 반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해안은 언제나 예비 종이 울리자마자 교무실에서 나온다. 수업시간에 늦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오늘 나의 수업은 엄마가 싸는 김밥 대 여섯 줄 값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가르치지 않는가. 문득 엄마는 김밥을 싸는 것을 좋아할지 궁금했다. 아빠는 뜨거운 제철소 안에서 땀 흘리며 부품을 검수하는 일을 좋아할지도 궁금했다.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는 행복하다.
이런 게 행복 아닐까.
빨간 립밤을 바른 입술에 힘을 주고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나는 행복하다. 나는 지금 선생님이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은 해안이 가장 좋아했던 고전 문학 중에 단편 몇 편을 골라왔다. 그녀가 고시원에서 시험공부를 할 때였다. 높고 좁은 고시원 계단은 5층까지 나 있었는데 하필 5층에 자신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창문이 건물 복도 쪽으로 나 있었다. 밖의 세상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작은 방에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놓여있었다. 5층까지 계단을 올라오려면 손이 가벼워야 하는데 해안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힐 때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아서 책을 펴면 나오는 그 구절들을 읽으면 다시금 숨이 내뱉어졌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쓴 책, 거기다 지어낸 말들이,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아주 잠깐의 일탈. 언제든 갈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자리. 그 자리에 가장 오래 있었던 책들 중 몇 권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사실 이 책은 남자친구, 진우가 군대에 가기 전에 자신에게 준 생일선물이었다. 진우도 생각이 많은 타입이었다. 때로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진우는 해안과 함께 주운 벚꽃 몇 장을 잘 말려서 책 사이에 끼어 주었다. 진우의 섬세한 마음이 아직 책 안에 남아있었다. 그래서일까. 고시원에서 책을 정리할 때도 이 책만은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제자들에게 이 책을 주려고 마음먹었다. 동아리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는 예은이와 규진이 둘 중 한 명에게 이 책을 주고 싶었다. 예은이는 학교에서 유명한 학생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면 누구에게나 주목받았다. 그녀의 긴 생머리에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게다가 성적도 늘 우수했다. 해안이 수업을 하는 2학년 2반의 반장이기도 했다. 예은이는 해안의 동아리에서도 대부분의 아이들의 추천으로 동아리 장이 되었다. 한편 규진이는 늘 조용히 책을 읽는 것에만 열중하곤 했다. 특히 책을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쓸 때면 더욱더 열중하곤 했다. 많은 학생들 중에서 그 둘은 닮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꼭 책을 주고 싶은 학생들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오지랖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해안은 자신의 책을 두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그 책은 결국 규진에게 갔고 그것은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 끝남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