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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Mar 02. 2024

12.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_2

몽글몽글 카페 사람들, 해안의 이야기

"그거 알아? 이번 중간고사 서술문제에서 나온 문제. 그거 해안샘이 규진이한테만 알려줬대."


창 밖에 두 아이가 입김을 호 불고 뿌옇게 서린 창에 자신의 이름을 적다 말고 규진과 해안의 이름을 적었다. 


"같은 동네라던데?"


"그건 어떻게 알아?"


규진이가 자랑하고 다녔으니까. 해안샘하고 버스같이 탔다고. 


"그래서 문제를 알려준 걸까? 해안샘 실망이야."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있다. 


'튀지 않도록 해. 어디서든 말 조심하고, 남에 눈에 튀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내향적인 내가 남의 눈에 튈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해안은 언제나 옷도 무채색 계열을 입었다. 검은색에 회색, 가끔 흰색을 입었다. 이렇게 개성 없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학교라고 생각했다. 개성 있는 아이들을 보면 해안은 무작정 마음이 갔다. '저 아이는 왜 저럴까'가 아니라 '나도 저런 면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들은 지금 행복해 보였다. 


 '저 아이들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일까?' 

 

해안은 궁금해졌다. 규진은 정말 조용했지만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여느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밝았던 규진이의 얼굴이 언젠가부터 어두워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말수가 더 줄어들었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 때 그 얼굴이 가장 편안해 보였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도서관, 창가에 앉으면 도서관이 있는 산속이 들여다 보였는데 마치 산속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다람쥐처럼 숲 속에 들어와 세상의 알맹이를 나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안에는 책이 있었다. 세상의 알맹이는 책이었다. 나는 비록 지구에서 가장 작은 존재일지라도 가장 큰 존재들이 남긴 책들은 내게 있다. 그 만족감이 나를 우월하게 해 주었다. 그 우월감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때의 내 얼굴을 규진이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런 규진이에게 책을 준 것은 사실은 내가 아니었다. 그 책이 규진이에게 갔다. 

규진이에 대한 나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선생님이 되면 이것만은 지키겠다고 생각했던 신념이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이 또 다른 아이들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게 해 주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재미있다는 이유로, 집이 잘 산다는 이유로 혹은 그 반대의 이유로 말이다. 그것이 내가 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런 잣대를 들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선생님이므로 나는 그 잣대를 들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권리가 있다. 그래서 교단에서 창 밖을 보며 교실 안의 아이들이 고개 숙여 책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손안에 큼지막한 도토리를 쥔 다람쥐 같았다. 세상과 동떨어진 학교, 그 안에서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비밀의 다람쥐라도 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선생님.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하십니다. 요즘 학교도 힘들어요. 이런 문제가 생기면...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니 교장선생님, 해안선생님이 뭘 잘못했나요? 그저 책을 준 것이고, 그 책에서 문제가 나온 것도 아니에요. 와전된 거라고요."


눈물이 흘렀다. 부장선생님이 교장선생님께 나의 이야기를 대변해 주었다. 교장선생님이 부장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미선생님. 요즘 부모님들이 예전 부모님들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그럼요?”


“누군가가 책임지지 않고서는 끝나지가 않아요. 장미선생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문제가 있어야 책임을 지지요!”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그게 문제예요!”



둘의 대화가 점점 더 격해졌다. 장미선생님은 심성이 여리지만 강단 있는 퇴직을 앞둔 교사였다. 이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왔고 아이들이 장미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미 선생님이 왜 인기 있는 줄을 잘 몰랐다. 이런 사실, 즉 공정하고 싶어 하고 바른 일이 되도록 잡고 싶어 한다는 그 사실이 아마 그녀의 희끗희끗 샌 머리 뒤에 있는 인기의 힘이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제가 책임질게요.”


조용해졌다. 예전과 같았다. 


나는 알았다. 이 학교에 온 순간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 너무나 행복했던 강단에서의 시간이 언젠가 끝이 날 수도 있다는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 불안감은 바로 이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본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불공정, 이유 없는 폭력,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 바로 나의 고 3 때 담임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이선생님. 역시. 제 학생 답네요.”


“기억하셨군요?”



소름이 끼쳐왔다. 


'이 선생님.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소름 끼치게 모든 것이 다 계획적이었던 그 예전처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안학생을 잊나?”


깡마른 얼굴에 드러난 광대뼈 그 위로 예리한 눈, 그리고 넓은 이마를 감추기 위해 매일같이 빗어 넘긴던 머리칼은 이제 거의 없었다. 예전보다 살이 조금 찌고 예전보다 피부가 더 좋아졌다.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는 간혹 가다 커지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줄곧 해안의 꿈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건 악몽이야. 꿈에서 깨어나. 해안아.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내 눈앞에 나를 살리려는 부장선생님과 나를 죽이려는 교장선생님이 동시에 들어왔다. 꿈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지독히도 생생하게 반복되는 불운의 띄. 그게 바로 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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