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몽글 카페 사람들
이현 : 걱정했어요. 해안 씨.
해안 : 미안해요. 먼저 가서. 제가 아직 좀... 정리안 된 것이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요.
이현 : 그럼요. 시간이 걸리죠.
물어보지 않을게요. 하지만 여기 있어요.
해안: 네?
이현 : 물어보지도 않고 나으라고 하지도 않을게요. 그냥 여기 머물러요. 떠날 생각인 거예요?
해안: 아... 아무래도 그 학생은... 저와 안 좋은 기억이 있을 거예요.
이현: 그렇지 않아요. 한주학생은 해안 씨가 정말 좋은 선생님이라고 했어요.
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현도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사실 야구부 학생이 잘생긴 카페 주인과 예술가 청년, 그리고 이현을 앉혀놓고 선생님에 대해 말할 때 그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야구부 학생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좋아했던 선생님이 학교를 떠났다. 한동안 학교에서도 작은 상실감이 감돌았었다.
이현이 주홍색의 단호박 수프에 눈같이 하얀 크림을 한 방울 조심스레 떨어뜨렸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린 초록 잎 두 장을 띄었다. 짙은 청록색의 손바닥 만한 컵에 담긴 주홍 수프와 동그란 나무 스푼을 해안이 앉아 있는 낡은 탁자 위에 두었다. 그제야 이현이 재빠른 손놀림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현: 나는 호박수프 좋아해요. 아플 때 달콤한 호박을 갈아 으깨고 수프를 만들어요. 갈고 으깨서 믹서기에 가는 동안 호박만 뚫어져라 봐요. 저렇게 곱게 곱게 사정없이 갈리잖아요. 우리도 사정없이 갈리는 중이에요. 몸은 늙어가고, 정신은 갈려요. 호박도 그렇고 인간도 그래요. 자 그렇게 아작이 난 호박수프 한 그릇이에요.
설득도 푸념도 연설도 아닌 이현의 말이 마치 피아노 위를 손가락이 두드리듯 자연스럽게 호박 수프 위를 흘러갔다. 그리고 뜨거운 연기가 아직 나고 있는 주홍색 단호박 수프를 바라보던 해안이 수프 위로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해안이 눈물을 닦아내고 힘겹게 숟가락을 들어서 호박수프를 펐다. 그녀의 느릿느릿한 동작이 점점 신중해졌고 빨라졌다. 생기 없던 그녀의 뺨이 천천히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해안: 따뜻해요. 맛있어요. 속이 든든해지네요.
언제 울었다는 듯 그녀가 해안을 보고 방긋 웃었다.
이현: 다행이다.
해안이 이현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해안: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하게 해안이 말했다. 방긋 웃던 이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이현의 얼굴에 놀란 표정은 없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변했다.
이현: 아마도 이 호박수프를 열 그릇은 먹어야 할 거예요.
해안: 이곳은 편안해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왜죠?
이현: 아... 왤까요?
이현이 고개를 들어 해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해안: 호스트가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이현을 바라보며 해안이 웃어 보였다.
해안: 맞아요. 내 아들, 재이가 늘 그래요. 못 말리는 엄마라고요.
해안과 이현은 탁자에 앉아 거문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현은 자신이 거문마을에 왔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무엇에 이끌려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해안에게 말해줬다. 해안은 이현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는 손깍지를 끼고 다시 이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해안에게 지금 이 시간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해안의 아빠가 공장에서 야근을 하는 날이면 엄마와 노란 귤을 한가득 까먹으며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들었었다. 해안의 엄마는 대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짧은 치마를 입은 대학생을 보면서 마냥 부러워했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17살의 나이에 공장에서 하얀 두건을 쓰고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 어린 동생들이 5명, 아빠는 술주정뱅이에 엄마는 배운 것도 없는 그저 가난한 집에 맏이로 태어난 엄마의 유일한 취미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이었다. 19살 꽃다운 나이, 그녀가 하루종일 입고 있던 땀에 절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새로 장만한 청바지와 하얀색 스웨터를 걸치고 나면 대학생인지 공순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봐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였단다. 그즈음이었다. 영화관에서 같은 공돌이인 아빠를 만났다. 서로가 대학생인 줄 알았다나. 그렇게 둘은 작은 예식장을 빌려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직후에 엄마도 보따리를 싸들고 아빠의 고향으로 왔다고 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부모와 동생을 떠나지 않았던 해안의 엄마가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온 날, 해안의 엄마는 보따리를 가슴팍에 묻고 밤새 울었더란다. 다시 그 가방을 들고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더란다. 대학에 가고 싶어 했고 영화관에 가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외딴 마을에서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도 살만했다고 했다.
해안이 7살이 되던 때였다. 엄마는 드디어 산책다운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해안의 손을 잡고 백화점을 들러 체크 치마를 사주었다. 그리고 영화관에 들러 영화를 보았다. 컴컴한 영화관에서 엄마의 본 엄마의 옆얼굴이 기억나는 듯했다. 주름진 해안의 엄마의 얼굴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늘 무표정했던 해안의 엄마에게서 처음으로 표정이라는 것을 읽었던 그날, 해안은 기뻤다.
엄마가 귤을 까며 하던 엄마의 소녀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해안은 그렇게 졸려왔다. 신 귤을 입 안에 집어넣다 결국 엄마의 무르팍에 얼굴을 묻고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마치 그날 같았다. 귤을 까며 엄마 무릎에 얼굴을 누이던 그때,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들었던 그때처럼 해안은 잠이 몰려왔다. 지금껏 느낀 적이 없던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해안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잊은 채 거실 소파에 누워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문 마을 게스트 하우스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