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딸아이의 학교에서 방문 수업이 있어 학교를 찾았다. 마침 그날은 '리드어톤(Read-a-thon)'이라는 행사가 막 시작하는 주였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단어였는데, 이제는 3년 차 학부모가 되어 "아, 또 그 시기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Read-a-thon은 말 그대로 read와 marathon의 합성어로, 아이들이 꾸준히 책을 읽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미국에서는 독서를 통해 기부금을 모으는 펀드레이징(fundraising)의 한 형태로도 자리 잡았다. 아이들이 읽은 책의 분량이나 시간만큼 후원금을 모으는, 참 독특하면서도 의미 있는 문화다.
딸아이의 학교에서는 각 학년별로 시대를 나누어 그 시기의 대표적인 책들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처럼 시기별로 나누어 책을 선정하고, 그 시대의 문화도 함께 배우는 식이다. 딸아이는 2학년이라 1970년대를 주제로 한 책들을 읽는다고 했다.
예전에는 의식적으로라도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압축된 정보를 손쉽게 받아들이는 시대,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문장의 의미를 곱씹는 일은 여간 귀찮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24시간은 너무나 짧아보이고, 너무나도 원시적인 지식습득이라는 독서는 빨라진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네 인간에게는 흡사 재래식 무기로 현대전을 치르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긴 호흡으로 읽기'에 다시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의 책읽기 습관을 기를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에 독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문득 작년의 Read-a-thon이 떠올랐다. 당시엔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통해 전용 앱을 설치하고, 각자 계정으로 책 읽은 시간을 기록했다. 기록이 쌓이면 앱 속의 디지털 나무가 자라나며, 아이들이 자신이 얼마나 읽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더 흥미로웠던 건, 친구들이 읽은 책이 피드에 올라오고 '좋아요(like)'나 '댓글(comment)'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어린이 버전의 인스타그램 같았다.
처음엔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딸아이가 '좋아요' 숫자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누가 내 글을 봤을까, 왜 친구는 좋아요를 안 눌렀을까. 빨리 내가 읽은 책을 올리기 위해 단순히 빨리 '읽기'에 집착하는 모습까지도. 이러한 모습들이 어쩐지 어른들의 SNS와 닮아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아이가 온라인 존재감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행사가 끝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 짧은 경험이 꽤 인상 깊었다.
사람들은 흔히 "책은 좋고, TV는 나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왜?'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의 가설은 이렇다.
활자를 읽는 행위에는 단순한 정보 습득 이상의 과정이 있다. 글자를 읽을 때, 우리의 뇌는 그 문장을 각기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한다. 각자의 경험과 지식, 감정이 개입되어 글이 '나만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책을 100명이 읽어도, 머릿속에는 100가지 서로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 뇌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자를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재구성한다.
반면, 영상은 그 과정을 건너뛴다. 영상 제작자의 시선과 해석이 이미 완성된 형태로 우리의 뇌에 주입된다. 물론, 훌륭한 영화나 다큐멘터리처럼 깊은 사유를 자극하는 작품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우리가 쉽게 접하는 영상은 생각의 여지를 줄이기도 한다.
100명이 같은 영상을 봤을 때의 결과는, 100명이 같은 책을 읽었을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획일적일 수 있다.
딸아이의 리드어톤을 계기로 다시금 '읽기'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수단이 아니라, 나라는 세계를 확장하고 재구성하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 감각—천천히 읽고, 생각하고, 내 안에서 해석하는 일—을 다시 회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