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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Nov 29. 2023

어떻게 생각해? 외국군인(마귀설화)

생김새 다르다고 배타적으로 대하지 마

서울도심 오아시스의 미군


약 10년 전 녹지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용산미군기지를 방문했었다. 물론 우리의 땅이나 방문목적과 인적사항 및 방문시간을 사전에 제출하여 미군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부대의 외부는 사람 키보다 높은 블록담과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어 부근을 지나는 서울시민은 내부를 볼 수도 없고 월담도 못하는 노터치 공간이었다,      


정문에서 사전 승인받은 내용의 재확인을 거쳐 부대 안으로 들어가 받은 첫인상은

‘아 서울도심 한복판에 이런 땅이 있다니! 오아시스야, 외국의 멋진 휴양지 같아.’   

  

드넓은 잔디밭과 골프연습장, 야트막한 푸른 산과 실개천에 흐르는 맑은 물 그리고 도로변의 큰 나무들.

함께 입장한 우리 일행들 모두 감탄사를 자아냈다.      

“이런 멋진 공간은 서울의 오아시스인데 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빨리 되받아내야 해.” 

“ 서울의 주거지역과 다르게 잘 보존되어 있네, 군부대로 보호가 되어있어 다행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군인은 비록 먼 타국에 와서 군무를 하지만 이런 멋진 녹지를 향유하다니! 시민에게 무척 소중한 자원임에도 이용치 못하는 현실을 그들은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군기지 역할을 마무리하고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되돌리는 과정에 있다는 뉴스를 봤지만 그 당시 가졌던 많은 아쉬움과 이를 어찌 못하는 안타까움.  이런 느낌을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만 받았을까?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많은 명나라 군대가 그들의 기준으로 우리 땅을 사용하여 우리 백성의 이용이 금지된 공간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와 관련된 설화를 보자.

   


  

향교에서 쫓겨난 마귀장군


예천향교에 공자님을 모시는 대성전이 있는데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마귀장군이 부하를 이끌고 향교 내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재울 수 있게 대성전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선비들의 생각에 대성전은 문인만 출입하지 군인이 출입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예천문인들이 들고일어나 안된다고 했으나  명의 군대가 어디를 가든지 잘 대접하고 모든 요구에 협조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어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공자 위패를 비롯한 모든 제사물품을 인근에 있는 정산서원으로 옮겼다. 그러자 개 들썩거리며 칼을 탁 찬 졸개들이 들어섰다. 대성전 공자 위패 자리에 마귀장군이 호랑이 껍질을 깔고 떡 정좌를 하고서 거드름을 피우자,


 “짝 짜짝!” 벼락 치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나더니 윗 대들보가 밑으로 내려오고 밑 들보가 위로 옮겨져 위치가 바뀌었다. 그러지 명군은 식겁을 하고는 내뺐다. 마귀일행이 전부 내삐고 난 뒤에 대들보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으며 지금도 돌았던 자리에 부서진 자취가 남아있다.      




    

우리 땅의 외군군인을 어떻게 대함이 좋을까?     


우리나라는 주변의 강대국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또는 우리 위정자들의 오판으로 여러 차례 그들의 군대가 주둔하여 우리 땅을 그들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우리 백성들의 이용을 막았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국가적 입장에서 그들의 행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평범한 시민으로서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바라봐야 할까이다. 


그들을 적대시하거나 외면하려는 것이 아나라 어찌 보면 그들도 평범한 생활인으로 먼 타향인 우리 땅에 와서 근무하는 것이나, 우리 땅을 근무 목적에 맞는 부분만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우리의 생활에 영향이 적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다. 물론 외국군인이 우리 땅에 있을 필요가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7년이나 걸린 긴 전쟁 중 수많은 군인들이 우리 땅에 와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들의 행적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우리를 도와주려 왔다는 명분으로 우리 조정과 백성들을 많이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직접 이들의 뒷바라지를 감당했던 이 땅의 수많은 백성들의 고초와 시련은 어떠하였을까?      


오죽하면 우리를 침략한 왜군보다 더 백성을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들 중 본받을 만한 군인은 마귀와 등자룡으로 두 장수는 그러하지 않은 군인다운 군인이었다.     


마귀의 설화는 한편이 전래하나 등자룡의 설화는 왜 없을까?     


마귀장군은 회족(무슬림)으로 정유재란 때 명군의 총대장이었으며 전쟁이 마무리되어 왜군이 철수하자 명나라로 돌아간다. 능력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하며 우리 땅에서 정말 열심히 싸운 장군이다.


 부하가 우리의 백성을 약탈하다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임금은 명군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으나 마귀장군은 그가 고의로 살인을 한 것은 아니나 처벌을 가하지 않으면 조선인을 살인해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할 것이며 명의 군대는 법도 없다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기어이 그 군인을 처형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리는 유적지가 합천군에 있고  손자가 서해를 오가다 풍랑을 만나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등자룡 장군의 경우도 명나라 수군의 부사령관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열심히 싸우다 배에 오르는 왜병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전사하였으며 남해군에 그의 충절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두 사람은 행적은 유사한데 마귀장군의 설화만 있다.  


아마 마귀는 한족이 아닌 회족으로 외모와 의복이 다른 명군과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육군으로 울산등 여러 내륙에서 전쟁을 지휘하다 보니 우리 백성의 눈에 잘 띄었을 것이다. 또는 일반 명나라 군사와 다른 모범적인 행동이 설화층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수도 있다.


등자룡 장군의 경우 수군으로 주로 바다 위에서 전투를 하다 보니 우리 백성과 만나는 기회가 적어 설화층은 몰랐을까?


예천의 지명


예천은 변한 지역에서 신라의 영토로 속하면서 수주(물 수, 술주)로 바뀐다. 통일 후 경덕왕의 전국지명을 개명할 때 예천(단술례, 샘천)으로 바뀐 뒤 고려 때 보주라 하다 조선 때 다시 예천으로 복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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