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나오는 설화 50여 편을 파악했는데 설화의 수집 지역과 이야기 무대가 대개 다르다. 인물 설화는 어느 정도 지역적 범주를 특정할 수 있어 설화의 채집장소와 이야기 무대가 일치함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왜 다르지?
설화가 생겨남은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과 관련이 깊다. 일본 식민시대 주민 이주와 해방 그리고 6,25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구성원들이 태어나고 자란 터전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게 되어 지역 공동체가 크게 위축되고 기능이 거의 발휘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설화의 채집지역과 구술 무대가 일치하지 않고 다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설인귀 설화의 경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기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한다.
설인귀(613~683년)는 중국 당나라 태종 때 장수로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중국인인 설인귀가 파주 적성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는 지명이 다수 존재한다.
설인귀가 적성에 있는 감악산 지역의 동네인 마지리, 식현리, 파평에서 무술훈련을 하는데 동네 순서대로 점점 더 큰 말을 갈아타며 훈련했다. 또 사기막 굴이 있는데 설인귀가 공부하던 돌로 된 의자가 남아 있다.
설인귀가 감악산을 돌아다니며 훈련하는 모양을 보자. 마지리(馬池里)에서 훈련을 해야 할 텐데 말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 설마리(雪馬里)에 오니 작은 말이 서 있었다. 그 말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니 식현리(食峴里)이고 거기에 더 큰 말이 나와 있어 그 말을 타고 달려 파평(坡平)에 닿으니 또 새 말이 있는 거야.
이 말은 호마(胡馬)로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호마를 타고 훈련하며 다니곤 했다. 또 사기를 굽던 굴이 있는데 설인귀 굴이라 한다. 택구라는 사람이 몸에 새끼줄을 두르고 굴로 들어갔는데 시간이 한참 흘러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새끼줄을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택구가 굴에 빠져 죽은 줄 알고 소리를 질러도 사람의 소리가 없어 내가 마구 줄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택구가 굴의 바닥에 내렸다. 동작이 무척 느린 택구였다.
택구가 굴 안을 살펴보니 돌 책상과 돌의자가 있었고 또 박쥐가 무척 많았다. 택구는 무섭다며 빨리 끌어내 달라고 해서 여러 사람 끌어올려줬다.
설화에서 언급된 지명은 적성지역에 현존한다. 이들 지명에는 설인귀가 태어나고 자라며 무술을 연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이하게 성장 이후의 지명 이야기는 없다. 설인귀 설화에 대해 언급한 자료가 상당히 있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적성에서 태어나 무술을 닦았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라서 자기의 재능을 살릴 수 없어 그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출세했다. 설인귀는 그의 재능이 고구려 멸망에 사용되어 무척 괴로워했다.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의 관리 책임자로 오게 되자 예전의 잘못을 갚으려고 선정을 베풀었다 한다.
또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거란의 군대가 적성지역을 지나가려 하자 산에 깃발이 펄럭여 마치 군대가 있는 것 같아 거란군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설인귀와 연관이 있다.
한강수계는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전 국토의 약 1/4 정도를 연계한다. 그래서 교통로, 운반로, 군사 이동로, 방어에 한강수계는 매우 중요하였다. 그래서 삼국 시대에 한강수계를 누가 장악하느냐가 한반도 패권에 절대적인 관건이었다.
이곳을 맨 처음 관리한 나라는 백제이었고 이어 고구려 신라의 순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패권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순서였다. 그러다 보니 적성지역은 군사적 긴장이 극심한 지역이었고 이곳을 장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도 수시로 바뀌는 상황이라 이들 지역에 사는 백성들 처지에서 어느 한 나라만 지지 함은 생존에 불리하여 중립의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군사적 충돌지역에 많은 장수가 왔다 갔을 것인데 삼국에 속하지 않는 설인귀를 대표적으로 기억하여 지명 설화가 생겼을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칠중현(七重縣)이라 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중성현(重城縣)으로 개명하고 고려 때 적성현(積城縣)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들 지명에도 군사 역할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