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9주차의 기록
수술 예정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37주차 이후부터는 아기가 언제라도 나올 수 있고, 더 이상 '조산'이 아닌 '정기산'이라고 해서 갑작스럽게 응급실로 달려가야 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지금까지 자궁수축이나 가진통이 한 번도 없었다. 오직 묵직한 태동만이 수시로 느껴질 뿐. 너무 빨리 커져버린 내 배 사이즈가 스스로도 적응이 되지 않아 여기저기 많이도 부딪히고 다녔는데 (특히 싱크대와 세면대 앞에서, 책상과 식탁 앞에서, 그리고 좁은 주차장에서 차들 사이를 지나갈 때) 좀 적응이 되서 조심해볼까 싶으려니 아기가 나올 시간이다. 이제 마음 속으로 아기와 하는 대화도 끝이고, 생전 처음 겪어본 체중 증가에 대한 스트레스도 바이바이다.
지난 주 부터는 5-year diary 를 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5년치 일기를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노트인데, 한 페이지가 1일이고, 그 1일은 다시 다섯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매년 빠짐없이 쓰다보면 마지막 5년째에는 1, 2, 3, 4년 전 오늘의 일기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여름이 절정을 달리던 올해 7월 말에 윌리엄스버그의 서점에서 산 노트인데 처음부터 아기를 염두에 두고 샀지만 어쩐 일인지 일기를 시작하자니 조금 쑥스럽고 어색해서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써야해서 그런걸까) 9월이 되고도 일주일이 지나서야 개시했다. 꼭 매일 쓸 필요는 없고 생각날 때 틈틈히 기록해서 나중에 아기에게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내가 하루 정도 빼먹으려고 하자, 안경을 벗고 침대에 누웠던 남편이 도로 일어나서 '그거 뭐 어렵다고 빼먹냐'며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본인이 쓰겠다고 한다.
임신 기간 중에 읽은 몇 안 되는 육아서적 중에서 <천일의 눈맞춤>이라는 책이 있다. 책 내용 자체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거기서 발견한 문장 중 꽤 마음에 와닿았던 말이 하나 있다.
"아이는 한동안 엄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이에게 엄마는 곧 모든 2인칭들의 총합이 된다."
여기서 '엄마'라는 단어 대신 '부모' 또는 '양육자'라는 단어가 쓰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튼, 내가 누군가에게 '모든 2인칭들의 총합'이 된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비유적인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나'와 '나 바깥의 모든 외부 요소/현상/자극'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세계관에서 실제 인지적인 현상으로서 누군가에게 '세상의 전부'가 된다는게, 너무나 큰 부담이면서 동시에 너무 멋지고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이런거야, 햇살은 이런거야, 슬픔과 기쁨은 이런거란다, 사랑은 이렇게 표현하는거야... 세상 모든 것이 새로울 작은 인간에게 내가 아는 세계를 하나씩 차근차근 안내해줄 과정이, 또 아기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날들이 기대된다. 물론 수많은 삐걱거림과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서 남편과 이야기 나눴던 것 중에 아직 완벽하게 답을 내놓지 못한 질문 하나는, '아이의 삶에 내 삶이 매몰되어 버리지 않으려면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까' 이다. '헌신적인 부모'에 대한 경계심을 나와 남편 모두 공유하고 있어서, 그리고 '헌신'이 잘못하면 아이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부담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걸 주변에서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아이를 끝없이 사랑하면서, 동시에 내 삶의 색깔을 잃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을까. 애초에 내 삶의 색깔은 뭐였을까. 그게 뭔가 성을 쌓는 형태는 아닐테고, 그물을 이어나가는 형태일까. 아직은 어떤 이미지도 잘 와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