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게 담기는 접시 위의 언어들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에 대한 유래나 역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조금 더 다양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박물관에는 대상에 대한 역사나 재밌는 설명 또는 개인에 의해 투영되어 버린 다각화된 재밌는 이야기들을 적어두어 작품 옆에 배치하곤 한다.
한동안 기쁘게 설명했던 말들의 찬탈당한 과거를 보며 멍하니 있기도 했지만 담기기에 적합한 것들을 찾아 적어두려고 한다.
말은 주워 담기가 어렵지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준비해 둔 주머니에는 충분하게 담아둘 수 있기에 아마도 설명이란 잘 가꾸어진 텃밭정도의 개념일 것이다.
무언가를 심고 그것을 키우고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어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 가장 중요한 건 씨앗의 종류가 아닐까 싶다. 강제적으로 뿌리 뽑히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흔치 않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글을 쓰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입은 바지에서 찾은 옛 취향의 달콤한 사탕 같은 영감이나 반복과 비반복 속에서 오는 찰나의 조각들을 바닥에 검은색 종이를 깔고 올려 질기고 억센 천으로 덮은 뒤 나만의 잣대로 빻아 비추면 반짝이는 것들을 선으로 이어 그림을 그리는 형식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유래가 없어진 전시공간에 설명을 적어두기는 어려웠고 입장객들이 볼 수 있는 건 그림메뉴판에 잡다한 조명뿐이었다. 유래 없이 단순히 빛나기 위해서는 더 값지고 반짝이는 걸 담아둬야 한다.
지금의 감정을 담기보다는 내가 선택한 색을 담아 넓게 펴놓으면 누군가의 컬러렌즈에는 다른 색이 보이길 바란다.
어떠한 색이 나오든 한순간만은 아련했으면 한다.
어느샌가 매미는 울지 않았고 낮아진 온도 탓에 나에게 할애된 빛과 따스함이 줄어들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게 어제인지 당시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빼앗긴 빛과 소리에 하루는 고요해졌고 점차 멈춰갔다.
온통 쨍한 파란빛에 밝았던 여름은 점차 시리고 여린 색으로 옅어져갔고 아쉽다기보다는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갈색이라 어떤 명도의 파란색이던 좋았다.
담고자 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그렇고 우울이어도 그렇다. 다만 지금 담기에 남는 것이 정확히는 남아 넘치는 것이 파란색이기에 무심코 잠결에 잡힌 이불 또한 파란색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은 과거도 있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설명에 생략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굳이 들춰보려고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비어있는 공란에 대해 설명해야 할 때가 온다.
그것이 부족한 설명에 대한 물음인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의 유통기한 확인인지에 대한 차이는 없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지기 전의 그것의 심정으로는 장난감이 적당한 비유인 듯한데 사고 싶을 때 사서 버릴 때가 되어 적당한 이유와 대체제를 갖다 붙여 버리는 물건이겠다.
굳이 애완동물이나 사람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다 상기의 인격체를 버릴 때는 대부분은 그러지 않거니와 버린다는 표현자체를 붙이기도 불편하니 나를 장난감 정도로 낮추는 방법이 편해 그러려고 한다. 적어도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 그 편이 나에게도 누군가들에게도 편하다.
아마 버린다는건 구매한 중고차가 과거에 침수차였던 사실을 알게 되어 얼른 팔아치우는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차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거를 팔아버린 사람도 잘못이 없다. 그저 그런 과거를 가지게 해 버린 누군가의 만행이거니와 알기 전까지는 문제도 없다.
사고이력이 있어도 차는 잘 굴러가고 망가지거나 휘어짐 없이 고쳐질 수 있다. 다만 나는 사람이기에 물에 잠겨 빠져 버린 과거가 무섭고 공포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계기가 생겨 극복하고 견딘다면 문제없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애초에 발생시키려 하지 않고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즐길 수도 없는 무력한 사람이며 그걸 즐기는 것보다 다른 걸 즐기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회피형이다.
늘 내가 다치지 않는 선택을 하는 편이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감정낭비를 극도로 싫어할뿐더러 욕심도 그리 많지 않아 싸워서 쟁취하기보다는 다음기회를 노리는 듯하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조금 부족한 터라 글이랑 현실은 다를 때가 많다.
매일 아침 알람소리보다 먼저 울리던 지긋지긋한 매미소리가 밤에 지저귀는 귀뚜라미소리보다 작아지고 느지막이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생각보다 밝은 세상에 눈조차도 살짝 부셔 다시 암막커튼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점차 없어질 것이다.
새파란 하늘에 노란색 타워크레인이 멋있어 한참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는 어느샌가 회색 건물이 자리 잡아 노란색도 파란색도 아닌 거울에 비친 햇살이 자리할 것이고, 뮤즈를 기리며 지은 뮤지엄은 숱한 이상론자들만 남아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허상의 뮤즈를 한없이 기다리다 결국 영화관 정도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분간은 휘청일 예정이다. 폭우가 내리고 계절이 바뀌고 좋아하던 색이 없어져 휘청이는 중이라 모든 게 흔들리지 않으면 내가 흔들린다는 걸 인지할까 싶어 같은 주파수로 흔들고자 한다.
난 컬러렌즈가 없다. 유독 파랗게 보인건 기분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