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own Sep 02. 2023

척척박사의 고민거리

외출 시 가면소재의 중요성



그러기를 원해서 그렇게 된 경우가 더러 있다.


대략적으로 인품, 지식, 외관 등의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작은 육각형이 아닌 큰 육각형처럼 보이게 볼록렌즈를 머리 위에 쓰고 다니는 느낌이기는 하다.


어느샌가 누군가와 모두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사회적인 지위가 상승한다. 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어른이 되어가는 것 또는 젊어본 경험이 많아지기 시작하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나에 대한 서사를 지키기 위하여 나이와는 맞지 않는 반짝이는 스티커를 모은다거나 푹신한 소파에 앉아 물컹하고 쫀득거리는 슬라임을 만지작 거리는 일들을 공사를 막론하고 누군가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나만이 함께하는 나만의 공간에서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페르소나를 갈아 끼운다.


사실 페르소나라고 하기에 나는 온전치 못한 존재이며 그렇게 되고자 하는 갈망과 노력이 있기에 페르소나라는 단어보다는 척을 한다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는 하는데, 항상 바깥에서는 그러한 척들이 있기에 오히려 벽을 치고 척을 지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그런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오히려 더욱더 노력을 하고 그 척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후줄근하게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 만나는 불특정의 누군가라던가 혹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안주하고 물음을 가지는 어리숙한 모습들 등 대부분 빈틈 있지만 자유로운 모습들을 포기했다.


유창하게는 하지 못하지만 비슷하게라도 따라 하려고 하다 보니 어느샌가 비슷한 정도의 선까지 척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고 이제는 척인지 척이 아닌지에 대해 고찰해 볼 시간조차 없이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몸에 꿰인 실은 없다. 다만 거미줄에 걸린 듯 끈적이는 느낌이 그리고 마치 케첩뚜껑이 굳어 무언가를 도출하려고 할 때 약간 버벅거리는 모습이 있는 듯하다.





혹자는 어떠한 척을 하는 것이 또는 페르소나를 끼워 살아가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새 신발은 언제나 불편하고 굽이 높은 구두일수록 발은 아프다.


그렇게 어떠한 것을 씌운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당장 붓과 글리터를 들어 가능한 한 조화롭게 색과 톤을 맞추어 몇 가지의 씌울 것을 맘에 들게 색칠하고 치장하고는 끼우고 싶을 때에 끼워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고, 지금의 만들어 놓은 씌울 거리들은 굳이 척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정도를 넘어 마음에 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청춘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바라는 척을 나의 색깔에 맞추어 변형시키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2차 가공을 하라는 말이지만 그게 다들 맘처럼 쉽게 되는 것이었다면 혹자들이라는 말을 서두에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가면을 쓴다고 해서 오감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가면을 제작하려고 한다면 두 가지 정도의 소재를 추천한다.


첫 번째는 베일같이 은은하게 비춰 환상 속에 있듯 약간의 보랏빛 안개를 자아내게 해주는 연보라색 실크다. 면사포는 내면에 있는 누군가의 단점이나 핸디캡등을 가리려고 만들어진 터라 뿌옇게 블러처리된 모습으로 상대방과 나를 비쳐 가면에 가려 내면에 있는 존재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비춰줄 나의 모습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아마 카메라의 필터에 블러가 많이 들어가는 경우가 이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로 추천하는 소재는 은분처럼 빛나지만 비치지는 않는 저가형 은박으로 된 소재이다. 가면을 쓰는 이유에는 전체적인 부분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위해 그러할 것이다. 가정하자면 어딘가에 던져 표현할 때 튀어 오르는 파장이 커 보일만한 지혜의 무게감이라던가 혹은 주위사람들에게 계기와 갈망을 주는 높디높은 리더십 정도의 예를 들 수 있는데 빛을 내기 위해 손을 비벼 불을 피우기보다는 문방구에서 은박을 사다 붙여 바르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다만 누군가가 나를 보았을 때 느끼는 반짝임에 있어 궁금함에 가면을 확인하려고 나만의 공간에서 가면을 뒤집어 보았을 때에 내가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빛이 나기로 결정했고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까 굳이 나인지는 확인을 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모방이란 진취적인 행동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약간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펼친 것이 아쉽지만, 척이기에 말할 수 있었던 것들 그리고 척으로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유치하고 다양한 과거의 허술했던 행동들과 지금으로 돌아와 그것들이 모두 지반이 되어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현재가 있기에 앞으로도 척을 할 생각이다.


내가 인위적으로 의도하여 척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체스말은 놓으면 다시 무르거나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수많은 생각과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한 후에 둔 수들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그렇다.


오히려 어떠한 척을 해야 더욱더 내가 빛날지 또는 어떠한 척으로 내가 더 성장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 중에 있는 게 지금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더 나은 방향의 끝에 있는 나는 아마 척척박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후천성 알레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