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캔버스에 부어버린 페인트통
세 번 정도였던 것 같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새벽녘에 눈을 뜨는 것이 세 번 정도 반복되면 곧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이제는 자다가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이상하지도 하물며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 일상이 되어버린 터라 세 번째의 잠에서 깬 후에는 알람이 울릴 핸드폰의 위치를 머리맡에 옮겨두었다.
오늘도 여김 없이 네 번째 잠의 문턱도 가지 못하곤 머리맡에서 성실하게 울리는 알람을 눈조차 뜨지도 않은 채 익숙하다는 듯이 머리맡을 더듬어 껐다.
찌르르하고 시큰한 눈을 뜨기 전엔 양손에 미약하게 남은 솜이불의 온기로 눈두덩이를 덮어 어제동안 눈에 담았던 빛과 색들을 가라앉혔다.
샤워를 하기 전 눈가가 뻐근해 거울을 보니 유독 흰자위엔 실핏줄이 많이 터져있었고, 어제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충혈이 된 건지 아니면 단풍이 물든 김에 눈동자에 자리한 하얀 캔버스가 같이 물든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흰자위에 담긴 색은 가을을 그리고 있었다.
어떠한 연유로 새하얀 캔버스에 계절이 담긴 그림을 그릴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계절의 대표하는 색을 넣고는 한다.
봄은 부드럽고 여린 연두색, 여름은 짙다 못해 뜨거운 파란색, 가을은 저물어가며 진득하고 달큼하게만 익어가는 호박색과 정지하고 다음신호를 기다리며 가만히 물들어가는 빨간색, 그리고 겨울은 캔버스의 새하얀 바탕색을 있는 그대로 두곤 암막커튼을 쳤다.
겨울이 아닌 계절의 색을 그리기엔 새하얀 바탕이 필요했고, 그마저 없을 때에는 새까만 밤이 되어 이러저러한 조명의 빛으로 나마 어떠한 계절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떠한 날의 새벽엔 피어나는 새롭고 싱그러운 연두색이 또 어떠한 날에는 정처 없는 못된 산길에 풀이 죽어 어스름한 바위덩이에 앉아 고개 숙여 신발끈을 묶을 때의 발바닥아래 바스러진 낙엽의 발그레함이 그리고 어떠한 날에는 번잡한 번화가의 조명에 밤에도 빛나지 못한 별들이 억울함에 이윽고 내려와 빛나주던 눈덩이의 새하얀 색이 계절마다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마주한 계절의 색들은 어느샌가 스며들어 찰나를 만들어낸 색들이었고 그 순간을 나는 '짙고 농익었다.' 또는 '완연하다.'라고 표현했다.
나의 눈두덩이에 있는 새하얀 캔버스에 담길 만큼 짙은 계절의 농도는 녹진하다 못해 잘 익은 홍시를 두 손으로 나눌 때만큼 조청처럼 말캉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캔버스는 예상보다 내구도가 낮아 쉽게 찢어지고 물들면 지우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계절의 색을 담기에 버거워했고 아울러 눈을 감거나 암막커튼을 치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하얀색 혹은 검은색을 찾아 겨울에 자리한 건 아마 눈동자가 흰색 캔버스에 검고 둥근 그림자가 져있고, 그 그림자는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밤하늘에 뜬 둥근달의 그림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의 농도는 굳이 색칠해 눈에 담지 않아도 자연스레 숨을 쉬고 걸으며 느낄 수 있었다.
농도가 짙어짐에 따라 내쉬는 입김이 눈에 보이는 정도로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고, 앞으로 걸어간다는 발자취를 새하얀 도화지에 남기게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다른 빛들이 많아서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렌지빛 가로등에 눈이 내리면 나는 떨어지는 오렌지색 별을 보러 나간다.
구태여 색을 담진 않았지만 품은 겨울은 오렌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