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잉크병과 점묘
어떠한 공간과 시간에도 대상과 나를 분리하는 것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내 검은 눈동자로 짙게 점묘하듯 찍어둔 작고 진한 점보다 포개진 눈매 옆의 풍경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워낙 소중한 것들이 많아 그런지 획으로서 주욱 그어대며 나의 색을 덧씌울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그것이 원래의 색을 잃어 빛나지 않을까 즐겨 찾는 우측 하단부에 점으로서 조그마한 표시를 남기는 것이 대상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그건 나만의 방식이긴 했다. 그래서 후회 또한 나의 몫이라 오히려 좋은 것 같다.
나는 아마 따스한 하늘에 나를 비비며 어딘가을 훑어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깃털이자 기억은 추억으로 굳혀 혀끝에 맴돌아 뱉지 못한 달콤할 것만 같은 말들처럼 내 안에 품어 삭혀 바닥에 깔아 둔 메마른 잉크병이다.
안타깝게도 널찍한 붓이나 스프레이 따위가 되지 못해 나는 여전히도 부재중인 문 앞을 두드리듯이 점을 찍어대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하나에 집중을 쏟아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에 있어 익숙했다. 달리 생각한다면 당장 집중하는 그 외의 것들에 있어 소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견도 생각해 봄직하다.
과집중 또한 집중력 결핍의 증상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작은 울타리를 깨부수고 넓은 붓을 들어 저 바깥의 세상을 색색들이 물들일 것인지 또는 더 높은 성벽을 세워 옹기종기 모인 작물들의 이파리에 생기를 불어 세세히 수놓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알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진 않지만 그래도 울타리 밖의 외출은 하고 싶어 혹시나 모를 인연이나 풍경을 대비해 메마른 잉크병을 박박 긁어 깃털 끝에 묻히곤 바깥으로 나왔다.
처음으로 눈을 떠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느낌의 정도라 모든 것이 낯설고 대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흥미롭다.
어떻게든 표시는 해놔야 한다. 차라리 내가 점이 찍히고 붓으로 칠해졌음 한다. 아직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