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창문에 파란 물감 칠하기
한풀이 꺾인 듯 한 추위를 보내며 겨우내 잘 열지 않았던 창문은 지독히 걸린 감기에 발바닥에서 전해오는 뜨끈한 온기를 무시하곤 찬바람에 혹시나 열이 오를까 의식적으로도 본능적으로도 방치해 두었다. 다잡아 말하자면 지금의 나로선 창문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방치라고 하기엔 바깥을 보기가 또는 문을 열어 세상의 찬바람이 쇠약한 내 몸에 닿기가 두려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창문은 불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창문은 그저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닌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선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감기라는 명목하에 홀로 아늑하고 고요하게 고립되어 나를 돌보았다.
어제는 오랜만에 상쾌함을 느끼고자 환기를 하려 커튼을 젖히고 나니 보이는 창문의 난잡한 눈자국들은 닦아낼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거뭇하게 얼룩져 더럽혀져 있었다. 이 겨울에 내 창문을 두드린 눈은 마냥 행복한 흰색이지는 않았나 보다.
두세 번 정도 폭설이 내려 눈꺼풀에 눈이 앉을 정도로 눈은 많이 왔고 당연히도 눈은 흰색이었다. 창문을 보며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본 눈이 정말 흰색이 맞을까, 창문에 얼룩진 거뭇한 눈자국이 나의 눈은 빛바랬다고 하고 있어 더욱이 그랬다.
사실 흰색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회상을 젖히고 창문 또한 젖혀 여전히 찬 공기를 눈이 시리다는 핑계로 암막커튼뒤에 치워 오랜만에 마주하는 햇빛이 살짝 데워주어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정도가 되었고 신선한 공기를 겨드랑이 깊숙이 까지 밀어 넣고 나니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오늘따라 낮은 낯설게 길었고, 겨울의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을 어제의 밤을 기억하지 못함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다가올 따스함을 겪기엔 아직 감기기운에 체온이 높아 날씨의 자연스러운 다정함을 느끼기엔 내가 부적하기도 하고 아직 영하의 온도에 감각이 없어진 상태로 어떠한 행복도, 아픔도 느끼기 싫었다.
단 한 번도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결국 지금 처한 상황에 맞추어 비틀어 버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오르막길을 걸을 때에도 뒷목이 접혀 뻐근할 정도로 고개를 들었을 것이고 아물기 싫은 상처가 벌겋게 그어져 있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디워시를 한 펌프 더 눌러 몸을 붉게 씻었을 때도 있었다.
그러기에 쇄약 해진 나를 바라보는 겨울의 끝의 창문은 나에게 더 어렵다.
창문 밖은 봄이 오려는 데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고, 나는 겨울이라 감기에 걸려 찬바람을 맞을 수 없다고 세상과의 문을 핑계라는 자물쇠로 굳게 잠가 걸었다.
투명한 창문에 흰색 눈송이로 얼룩져 검게 물든 자국들을 파란 유리세정제로 지우는 것이 어렵다.
나는 투명한 어항이었다. 아름답고 찬란해 빛과 같던 무언가에 비쳐 내 뒤엔 둥그런 그림자가 얼룩졌고 더 이상 얼룩지지 않기 위해 파란 물감을 뒤집어썼다.
눈은 하얗다. 꼭 그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