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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Jan 14. 2024

아시아 화교 이야기

13. 제3의 물결로 오는 중국인     

  진 씨 가문의 맏딸 쩨아이 사무실에 들렀을 때 쩨아이가 중국인 젊은 남자 한 명을 나에게 소개하였다. 대만에서  온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는 씩씩하게 나한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닉(Nick)'이라고 합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영어로 자기를 소개했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억양이다. 나도 손을 내밀고 인사를 했는데 그의 억양뿐만 아니라 그의 모습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그의 억양은 스리랑카인들의 독특한 영어 억양과  많이 닮아 있고 얼굴도 낯설지 않다면 스리랑카에서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쩨야이가 나중에 그 친구 얘기를 하면서 "내가 보기에 매우 스마트한 친구예요.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녀요." 내가 "잘 되었군요. 급여가 만만치 않을 텐데, 얼마나 주세요?"  하고 물으니, 쩨야이 왈, "급여는,  무슨 급여? 우리 콘도에서 살게 해 주었고, 식사는 우리 콘도  식당에서 그냥 먹고, 그리고 교통 잡비 정도 주어요." "그래요?  그런데 저 친구 대만에서 온 거 맞아요?" "자기가 대만에서 왔다고  했으면 맞겠지,  뭘" 다부진 면이 적은 제아이는 그 사람이 그랬다면 믿어야지, 하는 태도다. 여권을 보자는 둥, 꼬치꼬치 개인 사정을 묻는 것이 인격모독으로 생각하는 것이 쩨아이의 성정이다. 그리고 그냥 교통잡비만  주고 마음대로 부려 먹으면  땡잡은 일이지 않은가? 그것이 쩨아이의 계산이다. 내가 닉을 보고 낯이 많이 익다고 했더니 그가 스리랑카에 있었다고 실토를 한다. 스리랑카에서 몇 년 간 고생을 하며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지금 태국에 와서 새로운 삶을 찾고  있으니 자기를 많이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가 스리랑카에  있었다면 십중팔구 랴오닝성이나 지린성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출신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등, 관심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나에게 얘기를 하면 모르겠지만.

이 사람을 방콕에서 처음 보았던 때가 1990년대 초였는데  당시의 중국은 지금의 중국과는 완벽히 다른 중국이었다. 그때의 중국은  일반국민이  여권을 내어 해외로 나가는 일이 매우 어려웠던  폐쇄된 중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깨어 있는 젊은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외로 나가  돈을 벌고자 했다. 20 세기 초 산터우항을 떠나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향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굶주림을 피해 먹을 곳을 찾아 나섰던 샤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말레이의 고무농장, 주석광, 태국의 철도공사장, 사탕수수밭 등으로 간 취업인원도 있지만 그 인원이야 소수였을 것이고 대부분은 먼저 간 친지들의 연줄만을 가지고  가난한 중국을 탈출하다시피 하여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20세기 후반에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중국을 떠나고 있다. 그러나 영구 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는 나라들이 영구 이주를 허가해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리랑카 콜롬보에는 70년대 후반에 정부가 카지노 사업을 허가해주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정권이 별다른 자원이 없는 국가의 경제정책을 관광업 진흥에 맞추어 관광과 관련이 있는 사업에 많은 정책적  혜택을 주어 장려하였다. 소규모 카지노 한 두 개가 문을 열자 오성급 호텔  거의 전부가 카지노 사업을 시작하여 삽시간에 콜롬보를 카지노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80년대 초에 나는 한국의 건설회사의 스리랑카지사의  책임자로 근무를 했었는데  나의 근무 시작과 동시에 스리랑카에서 역사적으로 최초인 카지노 사업도 시작되었다. 스리랑카의 카지노클럽은 아주 소형이다.

면적이 우리 너비 단위로 100평이 될까 말까 하는 정도면 대형이다. 룰렛 테이블 세 개, 바칼라 테이블  5개,  블랙잭 테이블 5개 정도의 미니 노름장이다. 그런 작은 카지노가 좁다란  콜롬보  다운타운에 수십 개가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주요  고객은 태국인이었다. 태국인 고객은 숫자가 많았다기보다 배팅이 큰 고객이고 그들이 배팅하는 주위는 늘 시끌시끌하며 카지노클럽의 분위기를 활성화시킨다. 배팅이 아주 작은 한국인들과 일본인이 있었고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 현지인도 입장하였는데 그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갔다. 태국인들은 보석의 원석 수집상들이다. 콜롬보에서 100킬로 정도 떨어진 보석의 고장으로 유명한 라트나푸라에서 사파이어 원석을 사는 태국인들은 그 사업 자체가 갬블인 것처럼 카지노 갬블도 즐긴다.

중국인도 꽤 있었지만 메인랜드 중국(본토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전혀 없었고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온 화인들이다. 80년대의 중국은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여행의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미국에 불법 입국하려고 화물 컨테이너에 숨어 들어가다가  미국 하역 부두에서 발견된 이들의 처참한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던 그때의 중국, 그리고 지금 미국과 패권을 다투고 있는 중국,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런 중국의 부끄러운 역사는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상당 부분 계속되고 있다.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본토 중국인들이 스리랑카에 들어왔다. 젊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들고 떼로 나타났다. 정부기관의 관리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들을 중국회사가 수주하여 컴퓨터 일꾼들이 들어온 것이다.

공사를 수주한 건설회사 일꾼들이 또 떼로 들어왔다. 따라서 여자들이 들어왔다. 카지노에 이들 중국인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다른 외국인들은 점차 밀려 나갔다.

태국인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스리랑카 정부의 홀로서기 정책으로 보석의 판매를 태국인들에게 의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태국인들을 쫓아낸 것이다. 태국인들 없이 자체적으로 사파이어 원석을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정부가 작심하고 취한 조치이지만 악수를 두었다는 것은  얼마 안 가서 드러났다. 그래서 그 조치를 철회하였지만 태국인들이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중국인들이 대량으로 움직여 가는 곳에는 여자들도 함께 움직인다.

이 여자들은 일자리가 있어 온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따라온 것이다. 아프리카 앙골라에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두바이에도,  싱가포르에도 중국의 노는 여자들이  득실(?) 댄다.

콜롬보의 모든 카지노에서는 인심 좋게도 입장객 누구에게나 술과 담배를 무제한으로 공짜로  준다. 카지노에서 공짜로 주는  담배가 이들 노는 여자들의 수입원도 된다. 하루 저녁에 한 카지노에서 벤슨 헤지 담배 한 갑을 받고 또 다른 클럽으로 가서 또 한 갑을 받고, 그렇게 해서 열 군데에서 받아 챙기면 한 보루(carton)가 된다. 이것을 팔면 이만 원에서 삼만 원의 수입이 생긴다. 요령이 좋은 사람은 카지노 종업원과 짜고 담배를 빼돌려 나누어 먹기도 한다.

클럽에서는 식사도 해결할 수가 있으니 카지노에 드나들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어떤 남자가 돈을 많이 따면 주위에서 북돋아 주며 응원군 역할을  했던 여자에게 팁으로 칩을 던져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떤 남자가 자기를 원하면 따라간다.

이런 여자들이 몇십 명에서 몇백 명,  그리고 몇천 명으로 늘어갔다. 이들을 따라 들어오는 남자들이  있다. 이들 여자들이 중국에서 출국준비를 위하여 빌린 돈의 전주들 , 또는 대리인이  여자들을 쫓아 들어와 이들의 수입을 통제한다. 버는 돈을 빼앗아 빌려준 돈을 상환한다. 만약 못 갚거나 도망을 치면 잡아 내어 마사지 숍 같은 곳에서 철저한 감시하에 일을 시키고 버는 돈을 채간다. 이들 여자들 말고도 가짜의사, 미용사, 점쟁이등 여러 일을 하는 사람들도 들어온다. 이들을 나는 제3의 물결의 중국인으로 부르겠다.

여기에는 한국에 100만 명 이상 거주하며 살고 있는 조선족 중국인을 포함한다.

즉 20세기말에서 21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넘쳐나는 중국인들이  이들이다.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의 운전수는 인도계통의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어디로 모실까요?" "피닉스 호텔로 가주세요" "오차드 로드(Orchard  road)에 있는 호텔 피닉스요?" 백미러를 통하여  나를 보고, "일본인인가요?" "아니요, 한국사람이에요." 싱가포르의 인도계통 인구는 9% 정도 된다. 말레이시아에서 인도계통의 사람들이 특히 교통, 운수 사업에 많이 종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기왕 대화를 시작했으니 싱가포르에서는 어떤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옛날에는 그랬지요.  지금은?  글쎄요, 아직도 그런지 확신이 안 서네요. 싱가포르도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엉뚱한 얘기를 한다. "싱가포르는요,  지금  국제 창녀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어요." 내가 깜짝 놀라,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매일 공항에서 중국 젊은 여자들을 보는데요,  그거 다 창녀들이에요. 이제 보세요. 좀 있으면 싱가포르는 창녀만 있는 도시로 바뀌어 있을 테니까요." 말하는 투에서 무슨 이유인지 상당한 적의를 감지할 수 있다. 그 사람 말대로 싱가포르가 창녀도시가 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시사하는 바는 있을 것이다. 중국의 젊은 여자들이 들어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스리랑카에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두바이에서도 앙골라에서도 일상으로 보고 있는 현상이라  그 택시기사말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리고 궁금하다. '도대체  중국의 정권과 사회 지도층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중국의 산업전사의 위안부로 이해하고 있나?  혹은 외화획득의 재원으로 보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를 따르는 중국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증거로 보이는 예인가?

하기야 그것을 심각하게 보는 것은  기우(杞憂)일 수 있다.  개인의 경제활동이라고 보면  왈가불가(曰可不可) 할 일은 아니다.

그들이 치유하기 어려운 에볼라 같은 병균을 가지고 와서 중국을 오염시키지 않는 한.

2001년  스리랑카 시절, 어깻죽지 통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골목길에서 중국어로 쓰인 간판을 보았다.

지압(指壓).

그래서 언 듯 생각되기를,  혹 중국의 신통방통한 지압 시술가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밑져야 본전은 좀 더  되겠지만 한번 들어가 보자,  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인상 좋은  중년의 남자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맞이한다. 대번 아픈 어깨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댔다. 지압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의심이 짙어졌다. 무언지 모를 감각,  '이 사람 진짜가 아니네, 그래도 끝날 때까지 조용히 버티자. 체면은 살려주자.'

그는 그렇게 지압을 끝내고  마지막 조치로 무협지에서 읽어본 손가락 지풍을 두세 번 날렸다. 손가락을 총처럼 만들어서 휙 휙(소리가 날 리가 없지만)하고 지풍을 통증부위에 날렸는데 나는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 사람 표정을 보니 그도 분명 겸언쩍어 하고 있었다. 치료를 끝내고 내가 "얼마입니까?" 하니 "얼마입니다"하는데 너무 적은 액수다.

그래도 나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스리랑카에  카지노를 중심으로 놀고(?) 있는 중국인은 대개가 북부 중국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랴이오닝(遼寧省), 질린(吉林省), 헤이룽장(黑龍江省) 사람들이다. 소위 동북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요동반도에서 시작하여  북쪽 아무르(黑龍江), 동쪽 우수리강까지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중남부의 여러 성들과 비교하여 경제적으로 가난한 지역이라고  치부되는 지역이다.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보는 사람들은 내륙지방 사람들이  많았는데, 즉  쓰촨(四川)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린성의  조선족 중국인들의 소수가 인맥으로 들어와 있었다. 하기야 넖디넓은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나 다 올 수 있지만 인맥을 따라오기 때문에 특정지역으로 몰릴 수도 있다.

제1차와 2차 물결로 온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동남아 진출 중국인은 광뚱, 후지엔, 하이난 사람들로  특정 지워졌었고, 한국으로 온 중국인들은 거의 다가 산둥(山東)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3의 물결로 온 20세기말에서 21세기 초반의 사람들 대 부분은 돈을 벌러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즉 단기 체류자들이다.

그러나 그중 내가 앞에서 얘기한  태국에서 만난 닉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정주할 수 있다면 이들이 제3의 물결로 온 화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닉은 분명 스리랑카에서 수년간 체류했었다. 그도 다른 중국 동료들처럼 카지노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영어를 공부했다. 아마도 전력을 다해 공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발음은 거의 완벽한 스리랑카식 영어다. 나중에  닉이 말은 잘 하지만  글은 엉터리라는 것도 알았다. 말을 배우는 것과 글을 배우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글로 배우는 영어는 읽고 써야 하는 독서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불과 수년 정도의  단기로는 이루어 낼 수 없다. 영어를 잘하면 어느 나라를 가든지 일자리 구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닉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중 닉 과 같이 장래를 생각하여 영어를 열심히 익히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닉은 태국으로 왔다. 그리고 쩨아이한테 대만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불과 2, 3십 년 전 일인데 그때의 중국인은 중국인임을 되도록 감추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눌러살고자 했고 지금 그 길을 찾고 있다. 마음속으로 그는 죽어도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안문 사건과 반체제 활동 등의 시사성 이야기를 하다가 언듯 지나는 말로 그가 상하이에서 왔다는 눈치를  무의식적으로 내 비치는 실수를 했는데,  순간 흠칫하며  당황해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어찌 되었던, 그는 태국에서 정식비자를 받아 불법 체류자 신분을 면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 태국 국적을 취득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그는 그 길로 가리라 마음을 먹고 있다. 그가 보기에 쩨야이는 그를 도와줄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한다면 기회가 올 것이다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는 내가 그의 출신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 함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나에게 늘 공손함으로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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