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유럽의 부유한 식민지에 관용을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더더욱 몰아붙여 통제를 가하면서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곳곳에서 들고일어나는 반란세력과의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와의 전쟁의 전비로 충당했다. 펠리페 2세는 1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칼뱅파 신교도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했다. 종교재판이란 것을 열어 무수한 사람들을 처형했다. 6년 동안 8000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십만 명이 국외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당연히 저항이 없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의 영웅 오라녜 공 빌럼(영어권에서는 '오렌지공 윌리암'이라고 칭한다)을 지도자로 하여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전쟁은 네덜란드가 완벽한 독립국을 천명할 때까지 80년이나 지속됐다. 이를 역사책에서 ‘80년 전쟁’이라고 한다. 서기 1567년부터 1648년까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1581년에 북부 홀란트(Holland)를 중심으로 한 7개 주는 연방세력을 만들어 빌럼을 지도자로 하여 ‘네덜란드 연방공화국’ 독립 선언을 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저지대 17개 주의 남쪽 10개 주는 스페인령에 그냥 머물렀다. 그 이유는 그 지역이 가톨릭 지역이라 스페인과 같은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 벨기에 지역이다.
스페인은 즉각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금지시켰다.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가져오는 금, 은 등 모든 물자들을 중계 교역을 하면서 돈을 벌어온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는 상당한 타격이다. 그것보다도 스페인의 군사적인 공격은 집요했다. 해상으로의 침입, 육상으로의 침입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은 해상전투에서는 우위를 보였지만 육상에서는 패배를 했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줄타기 외교로 공동의 적 스페인에 맞섰다. 그러나 그들의 부를 축적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포르투갈을 압박하여 그들로부터 빼앗고 있는 아시아 항해로의 향신료 교역은 활발히 지속되고 있었는데, 돈 있는 자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어 과잉경쟁을 하는 바람에 이익률이 현저하게 감소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자성을 하는 와중에 영국이 동인도회사라는 것을 차리고 조직적인 사업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면 우리도 각개전투의 개인사업자들을 한 개의 회사로 통합하여 경쟁을 피하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수행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투자자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투자지분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의 주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다. 이를 약칭으로 ‘VOC’라고 칭한다. 투자자의 신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든 투자를 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기 투자지분을 양도할 수 있게도 하였다. 그러기 위해선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증권거래소도 필요했고 은행도 필요했다. 자본주의의 경제가 시작된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주식회사 형태가 아닌 건(件) 별 투자이다. 말하자면 이번 출항에 ‘투자할 사람 손 들어’ 해서 투자자를 모으고 출항에서 돌아오면 가져온 물건을 팔아 그 이익금을 투자에 따라 나눈다. 그것으로 끝. 그리고 새로운 건을 만들고 투자자를 모은다. 부유한 네덜란드 투자자들은 스페인과의 교역으로 돈을 번 사람, 인도와 동인도 제도에서 향신료 교역으로 돈을 번 사람, 네덜란드 전통의 모직물로 돈을 번 사람, 발틱 해와 북대서양에서 교역을 한 사람, 특히 염장 청어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 그리고 소액 투자자도 허용되었다.
부자 주인을 섬기는 하녀가 주인이 투자하는 것을 보고 나도 끼워달라고 부탁하여 투자자가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고 한다. 항해사업의 번성은 곧 조선사업도 꽤 수익성 있던 사업으로 만들었다고 추리된다.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배의 숫자가 다른 모든 나라의 배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지난번에 소개한 바가 있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유럽의 부가 축적되었던 경제강국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동인도회사, 즉 VOC는 정부로부터 다른 나라들과의 조약 체결권과 상관(商館) 설치 권한도 부여받았다. 현대의 주식회사에는 없는, 권력이 주어진 정부(왕권) 대리인 역할도 했으니 마음대로의 식민지 경영이 가능했다. VOC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의 협상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하여 학살도 주저치 않고, 약탈도 감행했다. 때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도 공격하여 재물도 약탈했다. VOC는 무려 200년 동안 향신료의 생산지, 인도, 실론, 동인도의 바타비아(자카르타)와 암본에서 무소불위로 활약했고 대만, 일본과도 교역을 했다.
헨드리크 하멜(Hendrik Hamel)이란 사람 일행이 표류하다가 1653년 제주도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조선에서 긴 세월을 억류되어 지내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여 돌아가서 ‘하멜표류기’란 기록을 남겼다는 것을 국사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도 VOC 선원이었다. 하멜 일행 64명 중 생존자 36명이 한양으로 보내졌는데, 그 후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 분산 수용되어 무지한 고생을 하다가 14명이 죽고 마지막 8명만이 탈출하여 귀국했다. 잔류자 8명이 더 있었는데 나중에 풀어 주어 귀국을 했다고는 하는데 더 이상의 자료는 없다. 인권(人權)이란 말이 있기나 했나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들 중 하멜이 돌아가서 조선에 억류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출판하였다. 무려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던 스토리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향신료 사업의 본거지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대만으로,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대만해협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육지를 만나 상륙한 곳이 제주도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효종이었다. 조선 정부가 잘했던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판단은 어렵다.
나는 젊은 시절에 이 책을 읽었었는데, 지적 수준이 달리던 미성숙했던 시절이라 별 감흥 없이 읽었으리라. 그러니까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역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진정이다. 그러나 때로는 알량한 민족주의랄까 하는 좁다란 폭을 극복 못 한다. 마음속 깊은 속에서 혹 “뭘, 자랑스러운 이야기라구” 하는 쫌끼(?)가 있던 것은 아닐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