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함대의 패배와 영국인들의 항해
영국 역사에서 국가를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두 명의 여성 지도자를 말한다면 튜더(Tudor)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마거릿 대처 수상을 꼽을 수 있겠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6세기 당시 가난한 후진국 영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만드는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받는다. 대처 수상은 20세기 노동쟁의로 국가 경제가 파탄이 나고 있던 영국을 노동쟁의의 온상이 되고 있던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정책으로 다시금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
사회주의 포퓰리즘에 빠져 허덕이는 ‘영국병’을 치유하여 경쟁의 사회로 돌이키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리하여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평생 결혼도 안 하고 44년의 긴 왕좌를 지켰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또 다른 여왕, 스페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를 필두로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신대륙은 스페인을 유럽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번영을 누리게 하였다. 이에 비하여 영국은 속수무책의 가난한 후진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의 식민지인 네덜란드가 이런저런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부유하게 되면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며 저항했다. 네덜란드는 막강한 자금력과 우수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이용하여 동인도의 향신료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향신료의 원산지인 인도, 실론, 말라카, 몰루카 제도로 항해하여 들어가서 교역을 하려고 하면 늘 그곳에 미리부터 자리 잡고 있던 포르투갈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평화롭게 거래가 이루어지기란 애당초 틀린 일이었다.
늘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내면서 수행하여야 하는 향신료 교역에 넌덜머리가 난 네덜란드는 아예 방향을 바꾸었다. 포르투갈인을 그들의 관심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독점적으로 교역을 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포르투갈의 압제를 받아온 원주민은 네덜란드에게 포르투갈인을 몰아내 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포르투갈이 한 세기에 걸쳐 많은 희생을 치러 가며 이룩해 놓은 향신료 원산지의 상관과 요새들이 네덜란드에 의하여 무력으로 찬탈당했다. 인도의 서해안 후추 교역지에 있는 여러 개의 포르투갈 상관과 요새는 네덜란드의 요새로 바뀌었다. 실론의 시나몬 요새도 네덜란드의 더치포트로,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몰루카 제도의 테르나테, 암본도 네덜란드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가를 보자. 가난한 후진국 영국을 스페인 무적함대가 침공했다. 침공 이유는 괘씸죄를 저지른 여왕 엘리자베스를 응징하려고 한 것이다. 당시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해군 함대는 너무나 막강하여 이를 무적함대(Spain Armada)라는 별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펠리페 2세의 아버지 카를 5세 때 튀니지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격퇴했고 펠리페 2세 때에도 그 유명한 해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주력 함대를 격퇴했던 막강한 함대여서 무적함대라고 불렸다. 괘씸죄를 나열하면, 우선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청혼을 했었는데 여왕이 일거에 거절하는 바람에 자존심을 심하게 상했다. 펠리페 2세는 이 일에 대하여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섬나라 가난한 나라의 뒷방 신세 공주 년이었던 네가 대스페인의 군주의 청혼을 거절해?’ 물론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퇴짜를 놓았겠지만 재미로 하는 얘기니까 너무 따지지는 마시라. 우리의 촌수 계산이라면 펠리페 왕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형부이다. 엘리자베스의 이복 언니 겸 선왕인 메리 1세의 남편이다. 또 하나는 스페인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하겠다고 전쟁을 불사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영국이 돕고 있는 괘씸죄, 영국이 로만 가톨릭을 믿지 않고 개신교(성공회)를 믿는 괘씸죄, 그것보다도 제일 괘씸한 것은 따로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란 영국의 해적이 서인도 제도 칼리브해에서 스페인 상선을 무차별 공격하여 많은 스페인 왕실자산을 약탈하였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여왕은 그를 체포하여 벌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에게 작위(爵位)를 주어 펠리페의 약을 올렸다. “이런! 이런! 망할 년. 넌 이제 죽었다.” 펠리페 2세의 분통은 가히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펠리페는 선박 130척, 선원 8000명, 병사 1만 9000명으로 무적함대를 중무장하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프랑스 칼레(Calais) 인근으로 출항했다. 1588년 8월이었다. 참고로 조선의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 1592년의 일이니까 한산도 대첩보다 4년이 빨랐던 해전이었다. 이 두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가는 유명한 해전이다. 나머지 둘은 기원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살라미스 해전과 그 유명한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의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이다. 펠리페 2세의 해전을 칼레 해전(Battle of Calais 1588 또는 Armada battle)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에서 칼레 해전의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들여다보자.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그의 정체를 나열하고 있다. 영국의 군인, 해적, 함장, 모험가, 영국의 기사(knight) 등이다. 그가 군인이었을 때 참전한 전쟁은 대표적으로 칼레 해전이었고, 그 외에도 여러 영국과 스페인 전쟁에 참여했다. 해적 생활은 주로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상인 선단을 약탈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 중 아주 중요한 것은 세계일주 항해이다. 마젤란이 첫 번째(사실 그는 일주를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다) 일주자이고, 드레이크가 두 번째 완벽한 일주자이다.
마젤란은 향신료가 있는 몰루카 제도를 목표로 항해를 했고 드레이크는 약탈을 목표로 하고 스페인 상선을 찾아다니며 세계를 일주했다. 마젤란은 태평양 항해 중 갑판에 서서 망원경으로 육지를 찾았을 것이고 드레이크는 스페인 갤리온선을 찾았을 것이다. 드레이크의 세계일주는 1577년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떠나 1580년에 귀항했다. 1540년에 태어난 그는 1596년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1545년에 출생하여 1598년에 사망했으니 거의 같은 시기에 해전을 치르면서 살았던 바다의 영웅들이다. 조선의 도덕군자가 해적질을 하거나 약탈을 할 리는 전무하니까 이순신 장군을 드레이크와 같은 무법자, 무뢰한과 비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겠지만 칼레 해전의 주역이며 영웅인 드레이크와 한산대첩과 명량해전의 영웅 이순신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드레이크는 초년기에 카리브해의 설탕을 재배하는 스페인 식민지 섬들에게 아프리카 노예를 공급해 주는 일을 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나포한 노예들이다. 드레이크가 직접 나포하는 일에 간여했었는지는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다가 카리브해의 어떤 스페인 식민지 총독과의 거래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그들 해군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배도 침몰하고 목숨만 겨우 건지는 사건을 당했다. 그 후 그는 스페인 선박과 식민지 마을을 공격하여 약탈을 하는 해적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그는 약탈한 재물, 즉 금이나 은 같은 고가의 귀중품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진상을 했다.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여왕은 드레이크의 해적 행위를 눈감아 주고 오히려 후원하기조차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반(反)스페인, 반펠리페의 사감(私感)도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부실한 국고를 채워주는 일이어서 정치적 배려가 더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스페인의 상선에 실린 재물, 특히 금과 은 등은 완벽히 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약탈한 것들이다. 약탈한 것을 약탈하는데 무슨 죄랴 하는 논리가 지배했을 것이다. 드레이크가 약탈한 큰 건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1573년에 파나마 포토시 광산에서 은을 잔뜩 실은 스페인 선단이 시에나로 가는 도중 드레이크가 선단을 공격했다. 약탈한 은이 너무 많아 15톤을 바다에 버리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향신료에 대한 열망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만의 것이 아니었다. 영국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와 달리 북극해를 통하여 몰루카 향신료 섬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다가 실패를 하고 좌절해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탐험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24년이 지난 1577년 상인들은 다시 돈을 모아서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그 일을 맡겼다. 마침내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지휘봉을 잡고 새 원정 항해를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드레이크 원정대를 적극 지지했음은 물론이다. 표면적으로는 남태평양 원주민들과 무역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탐험이었지만 여왕과 드레이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그곳에서 스페인의 배와 그들의 거점을 약탈하는 것이다. 여왕은 약탈을 해도 좋다는 전권을 드레이크에게 내려 주었다. 여왕은 드레이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페인 왕(펠리페 2세)에게 짐이 받았던 많은 상처를 보복할 수 있다면 짐은 무한히 기쁠 것이다.” 원정의 목표지는 극비사항으로 다루어져 모든 선원들이 영국 해안을 벗어날 때까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1577년 배수량 300톤 갤리온선 골든 하인드(Golden Hind)선을 주선으로 하고 다섯 척의 배로 선단을 꾸려 잉글랜드 남쪽 플리머스항을 떠났다.
선단은 대서양을 항해한 뒤 남미의 악명 높은 마젤란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면서 이미 작은 배들은 잃어버렸고 한 척만을 런던으로 귀항시키고 모선 하나로만 항해를 계속했다. 칠레와 페루 연안으로 북상하면서 스페인 배와 식민지들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약탈을 했다. 그리고 태평양을 건넜다. “꼬박 68일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하늘과 바다뿐이었다.” 마젤란 선단이 동인도 제도로의 항해를 성공한 후 50여 년이 지나서야 영국의 배가 몰루카 해의 테르나테와 티도레 섬의 화산 봉우리를 보았다.
그러나 드레이크의 항해 경비는 여왕이 부담한 것은 아니다. 런던의 상인들이 돈을 모아 투자한 것이다. 런던의 상인들이 그에게 선단을 꾸려 항해를 하게 한 것은 동인도 제도로 가서 향신료를 가져오도록 한 것이지 스페인 배를 약탈하여 금은보화를 가져오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주저 없이 스페인 배를 약탈했다. 그리하여 그의 배에는 약탈한 충분한 재물이 가득하여 그대로 귀국하여도 상인들에게 충분한 이익 배분을 보장해 줄 수 있었지만 그는 상인들의 향신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테르나테나 티도레섬은 모두 정향의 산지이므로 어느 섬이든지 닻을 내려 원주민과 협상하여 정향을 구매할 수 있지만 그들이 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안 테르나테 술탄이 스스로 마중 나와 영국 배를 자기 섬으로 초빙했다. 티도레에 요새를 가지고 있는 포르투갈이 현지 술탄을 겁박하여 싼값에 정향을 독점하여 쓸어가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테르나테 술탄이 영국을 이용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친 해적 드레이크는 예의를 갖추어 술탄의 초빙에 응하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배에 전량을 싣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을 구매했다. 그리고 앞으로 영국이 테르나테와 지속적으로 거래를 계속할 것이고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고하여 테르나테를 보호할 것이다 등 지키기 힘든 흰소리까지 했다.
정향과 식량이 되는 콩과 곡식을 최대한 싣기 위하여 여러 대의 대포도 물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수개월 후에 그의 골든하인드호는 플리머스 항으로 금의환향을 했다. 서기 1580년 9월의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배에는 향신료 말고도 금과 은, 진주 등의 보화가 가득 실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려고 항구에 몰려들었다. 옛 로마에서 개선장군이 들어올 때를 방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간다. 런던의 데트포드항에서 여왕이 배에 올라 이 용감무쌍한 지휘관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그 후에 이들의 역사적 항해를 기리기 위한 노래와 송시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드레이크가 항해했던 동방이 자기들 군주인 여왕의 땅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사실상 그들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그런 의미의 실체가 아닌 단지 해적으로서 약탈을 위해 항해를 했을 뿐이다.
테르나테에서 가득 실어온 향신료의 가치는 약탈한 금은보화에 비하면 사실상 미미한 수준이었다. 금은보화의 가치를 30만 파운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국고 세입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고 이 모두를 여왕에게 바쳤다. 런던의 상인들은 드레이크의 성공에 한껏 고무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다시 몰루카 제도로 떠날 선단과 지휘자를 물색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향료 교역을 위한 정보를 별로 남겨 놓지를 않았다. 향료의 값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중량 단위가 없어 효용가치도 적었고 특히 중요한 정보인 원주민과의 물물교환시 무슨 물건을 그들이 선호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하기야 그는 장사와는 거리가 먼 약탈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다른 해적들과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다음 항해에 필요한 정도의 돈만 챙기고 약탈한 재물의 대부분을 여왕에게 바치는 대범하고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여왕에게 바치면 그의 죄는 사면되리라는 계산에서 그리 하였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의 모험심을 경외(敬畏)하는 눈으로 보면 딱히 그렇지만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후에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멸시켜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것을 보면 오늘날 영국인들이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며 위대한 영국인으로 그를 꼽는다는 뉴스에 놀랄 일은 아니다. 스페인이 칼레에 무적함대를 집결시킨 것은 네덜란드 플랑드르 전선에 있는 육군을 영국에 상륙시켜 곧바로 왕실로 쳐들어가 여왕을 도륙 낼 셈으로 그리 한 것이다. 일단 상륙만 하면 육군이 허약한 영국은 그대로 패퇴할 것이라는 것이 펠리페의 생각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사령관으로 하여 바다에서 막으려 했고 드레이크는 칼레에 그들이 집결하기 전에 소규모 함선으로 스페인 항구를 공격하며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칼레에 대규모 선단이 집결한 것을 보고 소규모 함선으로 게릴라 해적 전투식으로 불을 질렀다. 동양식 표현으로 화공을 쓴 것이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큰 덩치의 배 상당수가 불에 타서 침몰하였다. 바람이 영국을 도왔다. 스페인 선단은 타격을 입고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고 돌아가는 도중 폭풍우가 몰아쳐 들어와 거의 괴멸했다. 그런데 칼레 해전의 양상은 여러 역사책에서 서로 달리 다루고 있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기가 힘들다. 영국 포의 사거리가 스페인보다 길었다고도 하고, 스페인 갤리온선이 너무 느려 바람에만 의존하지 않고 노로도 움직이는 영국의 소형 전투함이 더 효율적이어서 갤리온선이 속수무책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공통된 묘사는 화공이다. 드레이크의 해적식 전투의 승리였다고도 하며 스페인의 패배는 순전히 예상치 못한 바람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칼레 해전 이후에 대서양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고 무적이라고 여기던 스페인은 쇠락의 길을 걷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했다.
영국의 상인들은 드레이크의 향신료 반입에 고무되어 다른 선단을 꾸려 향신료를 가져올 것을 기획했다. 성공적으로 가져만 온다면 정례화하여 계속하여 이 수익성이 좋은 사업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서 정보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먼저 이야기한 바 있듯이 드레이크가 가져온 항해 일지에는 향신료에 관한 정보가 너무나 미약하여 그것에 의존하여 사업을 기획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런 일을 할 사람을 물색하다가 부유한 지주 출신 펜턴이란 사람을 찾아내어 지휘봉을 맡겼다. 결론적으로 항해 경험도 없는 몽상가 팬턴은 아프리카 서안의 대서양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다가 돌아왔다. 상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의지가 굳센 상인 출신이 항해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국제무역을 수행하고 있는 레반트 회사(Levant Company)에서 일하고 있는 랄프 피치(Ralph Fitch)란 사람을 찾아내어 그에게 일을 맡겼다. 그는 1583년부터 1591년까지 8년여를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그는 여행하면서 겪었던 모든 일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후추 생산지 인도의 항구, 도시들의 정보를 자세히 기록해 놓아 추후 영국의 향신료 무역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태동한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중요한 컨설턴트가 되었다. 그의 자료에는 오늘날에도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중동의 도시들이 언급되어 있고, 육로로 인도에 도달하는 지역에 대한 언급, 또 당시 포르투갈의 향신료 무역 기지 등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들이 있어 여기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1583년 2월 타이거라고 이름 붙여진 배로 시리아의 트리폴리(현재는 레바논 수도)로 향했다. 그와 동행한 네 명의 인사는 존 뉴베리(상인), 존 엘드레드(상인), 윌리암 리드스(보석상), 제임스 스토리(화가)인데 모두가 기본적으로 상인들이었다. 레반트 회사에서 이들 항해를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트리폴리까지는 배로 여행했지만 그다음 시리아에서 제일 큰 도시 알레포(Aleppo: 근년에 시리아 반군 ISIS와 심각한 교전이 있는 전장으로 유명한)까지는 대상과 함께 여행하고 낙타를 타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나아가 팔루자(Fallujah: 2004년 미해병대, 이라크 정부군, 영국군이 합동으로 이라크 반군과 이라크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시가전을 펼쳤던 곳으로 유명함)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건너 바그다드, 그리고 티그리스 강을 내려가서 바스라(Basra: 이라크 최대의 석유 수송항)에 1583년 5월에 도착했다. 거기가 페르시아 만(Persian Gulf)의 항구이다. 엘드레드는 그곳에 남고 피치와 다른 세 명은 배를 타고 호르무즈(Hormuz)로 향했다. 호르무즈는 포르투갈 상관과 요새가 있는 곳이다. 앞에서 얘기한 포르투갈 대항해의 영웅 아폰소 데 알부케르크가 1506년 이곳을 점령하여 포르투갈 요새를 건설하고 향신료 무역을 시작한 이래 두 세대가 지난 때에 영국의 피치일행이 당도했다.
참고로 호르무즈섬은 40km² 정도의 작은 섬이고 페르시아의 가까운 육지와 60km 떨어져 있다. 인도의 서해안 포르투갈의 점령지 고아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중간 기착지이고 페르시아와의 무역 허브이다. 마르코 폴로도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이곳에 대해 언급했다. "이곳은 향신료, 보석, 진주, 비단, 직물, 상아 등을 거래하는 인도상인이 모여 있다"고 했다. 오늘날 호르무즈해협으로 잘 알려져 있는 호르무즈는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미국과 이란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화약고다. 미국의 제재에 대하여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곳을 봉쇄하면 석유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나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임을 알고 미국에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협을 통하여 운송되는 원유가 세계 원유 운송의 20%라고 하니 엄청난 물량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카타르, 아랍에미레이트, 그리고 그들 이란이 원유 공급자이고 원유를 실어가는 나라, 특히 동방의 대소비국인 중국, 한국, 일본이 입을 타격은 절대적이다. 한국은 원유의 80%를 중동에서 수입하는데 그중 90%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여 수입한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한국의 국가경제가 그대로 무너져버릴 판이다. 미국이 이란 제재의 일환으로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작전에 동맹국 참여를 요청했는데 한국은 이란의 눈치를 봐야 할 형편이라 독자적으로 한국 상선 보호에 나서고 있다. 2020년 아덴만에서 작전하고 있던 청해진부대의 강감찬호를 호르무즈 해협 입구에 있는 오만의 무스카트로 옮기고 한국의 유조선과 상선을 보호하고 있다. 이 작전에는 미국과 이란의 양해를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지만, 호르무즈가 16세기나 지금 현재나 공교롭게도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피치 일행이 호르무즈 섬에 하선하자 곧바로 포르투갈 사람들 눈에 띄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영국인들에 적지 않게 놀랐고 포르투갈 영역에 침입한 영국 스파이가 아닌가 의심했다. 즉시 체포하고 감옥에 수감했다. 호르무즈 포르투갈 요새와 상관은 인도 고아(Goa)에 있는 포르투갈 총독부의 소관이어서 그들을 고아로 압송했다. 그런데 고아에는 토마스 스티븐(Tomas Steven)이란 영국 신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영국인들이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구명을 했다. 보석금을 주고 석방을 요구했다. 토마스 스티븐 신부는 영국 역사에서 제일 처음 인도를 방문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운 좋게도 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석방된 이들은 각자 갈 길로 가자고 합의하고 헤어졌다. 스토리는 수도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뉴베리는 그곳에 정착하였다. 피치와 보석상 리데스는 타지마할로 유명한 무굴제국의 아그라(Agra)로 갔는데, 리데스가 그곳에서 직장을 얻어 정착했다고 할 뿐 자세한 것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악바르(Akbar)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피치 홀로 원래의 계획대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는 소금, 아편, 납, 카펫 등을 싣고 야무나(Yamuna) 강을 항해하는 선단의 수송선을 타고 알라하바드에 도착했는데, 그때가 1585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다시 줌나 강과 갠지스 강을 따라 파트나(Patna)에 이르고 먼 동쪽 치타(Chittagong ; 현 방글라데시 동쪽 날개에 벵골만에 면한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버마 땅으로 들어가 랑군(Rangoon)으로 내려가서 이라와디(Irrawaddy) 강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의 태국 치앙마이와 치앙라이 지역에 있었던 란나(Lanna) 왕국에 도착한 때가 1586년 12월이고, 거기서 남쪽으로 남하하면 포르투갈의 향신료 교역의 최대 요새 말라카에 이른다.
1588년 초에 드디어 말라카에 도착했다. 지금도 그곳은 말라카(Malacca)라고 불린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145km, 두 시간 거리이다. 그리고 그는 그해 가을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하는 루트는 벵갈만의 인도 해안을 돌아 포르투갈 요새 지역 고친, 고아를 거치고 다시 호르무즈, 페르시아로 들어가서 바스라, 티그리스 강을 통하고 모술, 유프라테스강을 통하여 비르(Bir)로 갔고 1591년 런던으로 돌아왔다. 8년 만이다. 그를 아는 이 가운데 그가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 그의 직업인 상업활동을 하며 살았다.
그의 경험은 1600년 영국에서 동인도회사를 세워 아시아를 경영하고자 하는 설립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피치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인정하고 의지했었던 탐험가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그리고 다음에 얘기할 제임스 랭카스터 등이 그들 탐험가들이다. 여왕이 가까이 두고 후원한 천재 극작가, 영국의 자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셰익스피어는 피치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피치가 타고 떠난 배, 타이거호도 그대로 썼다. "타이거호의 주인인 그녀의 남편은 알레포로 갔다"는 문장이 맥베스에 있다고 한다. 피치가 1591년 영국으로 귀환한 사건 말고도 영국이 1600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동인도로의 본격적 향신료 무역을 위해 항해하기 전 여러 사람들이 도전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들을 후원한 런던의 모험적인 상인들도 손실을 많이 입어 동인도로의 진출은 실익이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팬턴이란 사람은 대서양도 벗어나지 못하고 대서양에서 헤매다가 돌아와 투자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실만 끼쳤다. 또 다른 여러 사람들도 그러했다. 항해의 실패는 투자한 자산 가치만 잃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잃는다.
어느 선단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일부라도 귀환했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알기라도 하겠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동쪽으로 떠난 선단의 잔해가 서인도에서 발견되기도 했는데 왜 그들의 잔해가 거기서 발견되었을까 하는 경위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항해를 성공하였던지 실패하였던지 간에 그들의 항해일지는 귀중한 자료이다. 목숨과 바꾼 경험들이다. 그런 경험들이 대영제국으로 가는 귀중한 요소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충실한 신하 프란시스 드레이크 말고도 또 한 명의 신실한 모험가 제임스 랭카스터가 있다. 그는 1600년에 설립된 동인도회사의 첫 번째 항해의 총지휘관으로 위촉되어 동인도를 항해하여 영국의 동인도 진출의 초석(礎石)을 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성공적 항해이전에 이미 동인도 항해에 도전하여 참담하게 실패하고 돌아온 항해일지가 있었다. 그의 항해 기록이 동인도 항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의 항해 행적을 쫓아보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