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에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북한은 캄캄한 암흑이나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밝다. 이것은 북한의 공산주의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간의 체제전쟁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차대전후 소련이 미국과 함께 전승국이 되면서 공산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확신되었다. 소련과 중국이 공산화되는 마당에 한반도의 공산화는 시간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가 가까스로 해방된 힘없고 가난한 민족이었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알지 못했다. 더욱이 미국도 당시에는 대한민국을 지켜주어야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주의로 적화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고 공산적화를 막아낸 것은 실로 이승만이 만든 기적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검증되지도 않은 허황한 유토피아 사상에 환호하는 동안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태평양잡지>란 간행물에 공산주의에 대한 논문을 여러차례 게재하였다. 1923년 3월에는 <공산당의 당 부당>이란 글에서 공산주의가 왜 잘못된 체제인지를 명쾌하게 지적하였다. 러시아에서 공산정귄이 등장한후 6년째에 발표한 이 논문은 공산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그 종말을 예견한 최초의 비판서였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에서의 평등주의가 빈부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등을 만들자는 취지는 대체로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지와 건물 등 모든 부동산까지 다 합하여 <모든 사람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는 것은 부지런한 사람이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을 먹여살리는 것이 되고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의 수가 늘어나서 결국은 일하지 아니하고 얻어 먹으려는 자가 가득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자본가들을 없애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지 않으며 자본가를 없애기 보다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식계급을 없애자>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교육하여 지식수준을 높이자는 것은 주장할 수 있으나 지식계급을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종교를 없애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자유 평등의 사상이 종교가 개혁되는 과정에서 발전된 것이며 종교를 없애는 것은 인류 도덕상 손해가 크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부도 없애고 군대도 없애고 국가도 없애자>는 주장은 기만에 블과한 것이고 당당한 자유국가를 만들고 군대를 길러 적들이 침략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정치체제로 본것이다.
나아가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1945년 12월 17일)이란 연설에서 공산당에 대한 정면대결을 선언한 바 있다. 이승만은 일시적인 실수나 이기심에서 공산주의를 추종하였으나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사상전향이 가능한 자들과는 협력할 수 있으나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파괴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원수와 같아서 타협이 불가능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승만의 반공투쟁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쓴 일기에 의하면(1950년 8월 14일) 625 전쟁에서 대구 마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미국의 무초 대사는 이승만에게 제주도로 피난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권총을 꺼내서 적이 내 앞에 나타나면 이 총으로 부인을 죽이고 적을 죽인 다음 자신도 죽을 것이며 절대로 정부를 옮기지 않겠다고 하였다. 1954년 7월 28일에는 이승만의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으며 도덕과 종교, 인권을 무시하고 정복 야욕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공산당은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끔찍한 세력이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중국을 자유화하고 한반도의 휴전을 종결하여야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승만의 반공정책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는 <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아닌가 한다. 625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이 휴전을 하려고 하자 이승만은 휴전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미국이 이에 동의하지 않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단독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단행하였다(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미국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을 근거로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어 북한의 남침을 방지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경제지원까지 받게되어 대한민국이 획기적인 경제발전의 기회를 얻게되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그간 여러 정권에서 <민족>이니 <평화>니 하면서 막대한 대북지원을 했지만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돌아온 것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정책이 강경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어떻게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가 문제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답은 간단하다. <이승만의 반공정책을 계승하면 된다>. 이승만의 정책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