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흔히들 작품과 상품의 차이점을 고유성에서 찾곤 한다. 고유한 것은 작품, 흔한 것은 상품이라고 정의하면 대체로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공장에서,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면 작품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건값이 비싸고 생활의 질을 크게 개선시켜 줄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하루종일 함께 생활하는 핸드폰 같은 전자기계들이 그 예이다. 천재적인 사람에 의해서 고안되고 생산되어 수많은 이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지만 이것들은 작품은 아니다. 고장이 나면 조금 아쉽지만 금세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물건이 지니고 있는 추억과 손때의 흔적까지 살 수는 없지만 말이다.
물건이 아닌 다른 경우도 살펴보자. 먼저 곤충 같은 것을 생각해 본다. 곤충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다. 최근 들어 자주 보이는 무당벌레, 땅바닥에 자주 보이는 개미, 여름철 조명 아래로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것들. 개별 곤충의 특성이라고 하는 게 있을까? 나방을 두 마리 잡아다가 관찰을 하면 각각 나방이 갖는 다른 특성을 구분해 낼 수 있을까? 곤충학자들은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범인인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그 나방이 그 나방처럼 보일 것 같다. 실제로 그렇지 않을까? 바닷가에 자주 보이는 돌게나 바다바퀴 같은 것들도 독자성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곤충들은 습성을 공유할 뿐, 저마다 독립적인 고유함을 지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물들은 어떨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 제주에서 종종 보이는 말 같은 동물들이 떠오른다. 그래도 동물 정도 되면 어느 정도 구분이 되는 것 같다. 같은 종의 두 마리 강아지를 정확하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다를 수 있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납득이 된다. 그러나 강아지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개’라고 하는 동물이 지니는 습성의 발현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개라는 동물은 무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어떤 종은 무는 습성이 아주 발달해 있고, 어떤 개는 좀 덜 발달해 있다. 동물을 놓고 볼 때, 개별 동물의 고유성이라 하는 것은 이 습성의 발현 정도일 뿐이다. 그래도 곤충 같은 것들 보다는 좀 더 개체마다 차이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동물들을 저마다 다른 존재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왜 나는 너가 아니고 나인가? 나는 너 일수 있는가? 너는 나 일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왜인가?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곤충이나 동물의 경우에서 보듯 ‘종’ 단위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은 ‘개인’ 단위로 구분된다. 저마다 다른 이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나는 결코 너일 수 없다. 너도 결코 나일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비슷한 욕구를 갖는다. 졸리면 잠을 자야 하고,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허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잠을 많이 자야 하는 사람도 있고, 좀 적게 자는 사람도 있다. 음식 중에도 기호가 분명하다.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 할지 모르겠지만 요즘같이 먹거리 종류가 다양한 시대에는 꼭 그렇다고 보기도 힘든 것 같다. 면을 좋아하는 사람, 밥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기호가 있다. 기본적인 욕구를 느낀다는 점만 같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설령 같은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두 사람을 꼭 같은 기호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같은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가 그 두 사람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단 하나의 존재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학습’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전을 생각해 본다. 나는 시험 점수만을 생각하는 학생들이 아닌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히 그들 속에 저마다 가진 기질이라는 것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떤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노래하듯 말을 하고, 어떤 아이는 몸을 쓰는 데에 능하며, 또 어떤 아이는 글자를 일찍 터득한다. 자라면서 이들이 자연스럽게 끌리는 활동들을 한다. 저마다 시간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자신을 만들어 간다. 어린아이일 때에는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구와도 같지 않은 한 개인이 만들어져 간다.
때로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충실하게 따르고자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사회가 미덕이라 분류해 둔 것을 따라 살기도 한다. 대체로 이런 미덕은 명예를 획득하거나 부를 획득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많다. 기질대로 살거나, 자유롭게 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하는 믿음도 이 같은 ‘사회화’의 부작용 중 하나이다. 사회화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탓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신의 인생이 아닌 표준의 인생을 좇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써보아도 어쩐지 나는 희석되어 갈 뿐이다.
‘YES’만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충실히 사회화가 되어가고 있는 수많은 개인의 모습을 본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주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 남과 같이 살기 위해서 많은 ‘YES’를 외쳤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았다. 이래도 오케이, 저래도 오케이였다. 어찌 됐건 ‘나’야 아무래도 좋았으니 말이다. 나는 표준에 가까워지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 뿐, 나 자신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무분별한 수용은 술에 물을 타버린 듯 나로 하여금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게 하고 말았다. 나는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안다. 삶의 비결은 ‘YES’에 있는 것이 아니라 ‘NO’에 있다는 것을.
항상 좋다고만 하는 사람보다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더 매력이 있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사람이 좋다.
‘취미’는 시간 낭비일 뿐이라 생각하고 항상 쫓기는 사람보다는 가끔 아이같이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이 좋다.
‘YES’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는 것 같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라는 개인은 희석되고 만다.
아, 나는 독불장군의 인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타인을 수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권리 포기는 늘 아름다운 것이지만, 권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본디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가. 남처럼 살아가고 있으면서 대의를 위해 뭔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이 되기가 두려워 남이 되고자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사람은 타인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다 살아내고야 마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비밀을 푸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는 표현력 부재에 대한 급습이라고 하였다.
나는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수 없다는 이 한 문장을 글로 쓰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누구도 나와 꼭 같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흔히 꼰대 마인드라고 부르는 지적질도 사라질 것이다. 내가 걸어온 삶의 여정을 공유할 수는 있지만, 나는 다만 다른 길을 걸어왔을 뿐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길은 나의 길과는 다르다. 훌륭한 리더는 티칭 하지 않고 코칭한다고 한다.
‘너도 나처럼 해.’, ‘그땐 다 그래.’ 같은 말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한다면 이것은 아마 티칭에 가까울 것이고, ‘그럴 수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이 있었어.’, ‘나는 이렇게 행동했는데 너는 어때?’ 같은 말을 한다면 좋은 코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신비한 것은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단 하나도 같지 않다. 저마다 삶에 새겨진 기질을 따라 시간을 살아간다. 시간은 인생을 빚는 놀라운 손길이다. 살면 살수록 고유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자신이 없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남처럼 살 수밖에 없다. 그의 인생은 얼굴을 잃은 것과 같아서, 다른 이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이 많이 모인 번화가에서 누구를 찾느라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사람들을 저마다 부르는데 전부 돌아볼 때마다 같은 얼굴인 것과 같다.
나는 나이다.
남이 되기를 포기할 때, 겉모습을 꾸민 포장지보다 더 값진 보석이 내 속에서 빛나기 시작한다.
내가 쓰는 글도 그런 면에서 나를 더 선명하게 해 주는 도구인 것 같다. 이 글은 나만이 쓸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이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이 ‘자유’를 정의한 구절을 떠올린다. ‘자유’란 자기의 이유로 걸어가는 것이다. 자기의 이유야말로 순도 높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타인의 이유가 아닌, 자기의 이유로 살아가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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