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전기밥솥의 '취소' 버튼이 고장 났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고 했던가. 나의 밥솥은 모음 하나의 차이로 나와 남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남편에게 웃으며 말했다. "취사 버튼이 고장 났으면 바로 새 거 사야 했을 텐데 취소 버튼이 고장 났네. 하하." 남편은 "오래 쓰긴 했지."라는 말을 했지만 선뜻 새로 사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말은 저렇게 했지만 새로 나온 밥솥에 대해 검색하거나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 집에 이사 들어오며 건조기를 장만한다는 이유로 세탁기를 교체하고, 인덕션과 식기세척기도 들였다. 그때 밥솥을 바꿀까도 고민했지만 새 밥솥을 사기 위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버튼이 고장 났는다는 좋은 구실이 생겼는데도 아직은 취사가 된다며 나는 이 밥솥을 끌어안고 있다.
올해로 나와 함께 한 지가 만으로 11년이 되었으니 고장이 날만도 하다. 결혼 선물을 사 준다는 사촌언니와 함께 가서 고른 전기밥솥이었다. 언니는 더 비싸고 좋은 걸로 고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했다. 정말 그랬다. 이 밥솥이 남편과 내가 처음 집에서 먹은 밥도 했고, 세 아이들의 이유식도 만들어 주었으며, 지금까지 우리 가족의 밥을 책임지고 있다. 중간에 압력이 잘 안 되어 부속품을 바꾸어야 하나 했는데 다시 밥이 잘되어서 수리 한 번 없이 아직까지 잘 쓰고 있다. 생각해 보니 이 정도면 충분을 뛰어넘어 훌륭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결국은 바꿔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무리 물건이라지만 함께 같은 공간을 그리고 많은 시간을 공유했으니 정이 든 것 같다. 항상 이 밥솥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밥솥이 자리 잡고 있으면 왠지 어색할 것 같기도 하다. 밥솥만큼 오래된 냉장고도 바로 옆에 있는데 사실 냉장고는 여유가 생기면 바꾸고 싶다. 내가 사고 싶은 냉장고를 이것저것 찾아보고 그것들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일까. 냉장고도 막상 무언가 하나가 고장 나면 또 아쉬운 마음이 들까.
아무래도 밥솥과 나 사이를 끈끈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그 무언가의 처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선물이라는 좋은 기억이다. 그다음부터는 시간의 힘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매일매일 소리 없이 적립된 기억들이 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내 손으로 씻어주고, 쌀을 담아 밥을 하고, 그 안에 있는 따끈한 밥을 떠서 온 가족이 나누어 먹었던 기억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추억이 되었다. 그 추억의 장면들에 항상 이 밥솥이 작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 사용한 물건들이 고장 나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마찬가지지만 밥솥의 취소 버튼 하나가 고장 난 걸 알게 된 날에는 왠지 모르게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너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같은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취소 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뽑아내면서 다른 버튼도 아니고 스스로를 멈출 수 있는 버튼이 고장 난 것이 더 안쓰러운 마음이다. 오래 일해서 고장이 났는데도 하던 일을 멈출 수 없고, 강제로 전원 플러그가 뽑혀야만 중단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밥솥은 내가 자신의 플러그를 뽑아줄 때까지 계속해서 자기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그 안에 있을 밥이 식지 않도록... 이제 떠날 때가 되니 조금이라도 내 손길을 더 많이 받고 싶어서라며 내 마음대로 이 사물에게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버튼을 누르나 플러그를 뽑나 결국 내 손이 가야 하는 것은 같은데 이런 식으로 다가올 밥솥과의 헤어짐이 아쉬운 마음을 괜스레 이 물건에게 투영시킨다.
예전에 쓰던 식탁과 헤어질 때가 기억난다. 다섯 식구가 되어 이 집에 이사 왔기에 4인용 식탁을 더 큰 식탁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아까워서 거실 창가에 두고 1년을 넘게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책상으로 쓰다가 결국은 그 식탁의 수거를 요청하기로 했다. 학교와 유치원을 다녀온 아이들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탁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에는 필요가 없어 식탁이 필요한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로 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도 그동안 그 식탁과 함께한 시간이 어떤 의미로 남아있었나 보다. 심지어 둘째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인사를 못했다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슬퍼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나는 아이들에게 미리 알려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어쩔 수 없이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아파트 앞에 내다 놓은 식탁에게 가서 아이 셋이 인사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이별 의식 같은 과정을 거쳤다. 아이들은 그 식탁에게 뽀뽀를 해주고 안아주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새 주인 만나서 잘 지내~"
지금 당장 밥솥을 교체할 생각은 없다. 오늘도 이 밥솥으로 밥을 잘 지어먹었다. 아무래도 주요 기능이나 부속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는 계속 사용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밥솥과 헤어질 때가 오면 아이들처럼 뽀뽀는 못해주더라도 마음속으로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밥솥 사진과 내 글을 함께 남기는 것을 밥솥과 내가 함께 찍는 사진 대신으로 해야겠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대단한 것이긴 한가 보다. 밥솥 하나 가지고 이렇게 청승을 떨게 만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