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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의 경지 Aug 29. 2024

어중간한 나의 여정(1)

또 퇴사 하겠습니다.

회사의 경영상태는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밥벌이를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밀양이라는 도시에 온지 7년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틈틈이 중국에서 들어오던 발주도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오너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동일한 내용의 보고를 여러 번 해도 다음날이 되면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매순간 퇴사하는 꿈을 꾸었지만 지금껏 가장 오래 다닌 회사이고 마음 편하게 다닌 회사여서 하루하루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사고로 병원에 두 달간 입원하게 되면서 이 회사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원을 하고 목발에 의지해 출근을 하니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가 있었고 동료들은 이미 그만둔거 아니냐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내 나이 40중반을 갓 지나가고 있었다. 또 다시 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몇번의 이직을 경험 했지만 새로운 환경을 마주한다는 것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했다. 더욱이 곧 50을 바라보는 경력의 끝물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더욱 주눅들게 하였다. 눈 딱 감고 버텨볼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더이상 그럴 힘도 이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공백 없이 회사를 다녔으니 잠시 쉬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더구나 가정을 꾸리지 않은 미혼의 신분이니 걱정될 게 없었다.


2개월 가량을 더 버티고 필요시 업무 관련 전화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회사에서 권고사직 처리를 해 주었다. 꽉채운 그 해를 마지막으로 퇴사를 하였다. 엊그제 입사 한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 7년4개월이 흘렀다.

가장 오랜시간 돈벌이를 한 곳이었던 것 만큼 아쉬울 것 같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인지 덤덤했다.


퇴사한 다음날 적어도 일주일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4대장 종주길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 다음 중국여행 그 다음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수술한 발목이 발목을 잡았다. 매 진료마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는 귀에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아직 무리하게 발목을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에 하나 발생한 휴유증으로 디시 병원생활을 한다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계획했던 게 틀어지고 출퇴근이라는 루틴이 사라지니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회사에서 업무 관련 문의 전화가 왔었다. 몇 번 구두로 설명을 해 줬더니 더 이상 문의 전화가 오지 않았다. 회사 사정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 않는 이상 나를 다시 부를 가능성은 점점 사라졌다.

매일 아침 재활삼아 만보를 걷고 집에 돌아오면 졸음이 쏟아졌다. 한번 눈을 감으면 일어나기 힘들었다. 

겨우 일어나 앉아 있으면 또 잠이 왔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우울하다는 증거였다. 

유일한 사교장이었던 테니스도 할 수 없으니 사람 만날 일이 없었다. 아침 도보시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겨우 유지하던 만보 루틴도 하루이틀 빠지다 어느순간 방안에서 유튜브만 보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더이상 집 밖을 나오지 못 할 같았다.


검색 란에 중국어,해외영업,무역을 입력한 다음 묻지마 입사지원 클릭을 시작한지 보름이 지나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채용 공고를 상세히 살펴보니 그야말로 내가 해왔던 업무와 정확히 일치했다. 

진정 채용계획이 있다면 분명 나를 뽑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받아줄 곳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빠른 연락에 기쁘기도 걱정되기도 하였다.


대표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출근 날짜를 확정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근처 부동산으로 향했다. 회사가 있는 부산 지역으로 또다시 이주해야 했다.




"심차장"

그가 나를 불렀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합창단 활동으로 단련된 그의 굵은 음성은 활짝 열려 있는 대표실 문밖으로 명확하게 울려퍼졌다. 

젊은시절 그는 일본을 오고가며 식품기계 무역업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것을 걸고 제조업에 뛰어 들었고 여러 고비를 넘겨가며 현재의 60명 남짓한 어엿한 중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모르긴해도 그가 가지는 회사에 대한 애착은 그의 가족과 비견되지 않을까 한다. 그는 회사에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뭐든 취했고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버렸다. 


4개월전 경력직으로 입사했을 당시 나보다 한달 먼저온 차장을 포함해 6명의 영업직원이 포진해 있었다. 동종의 기계설비 업종에서 여러번의 이직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6명이라는 숫자는 의아했다. 산업설비의 경우 B2B로 일이 진행되는게 일반적이어서 개인의 영업역량이 수주에 역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업종은 시장의 영역이 다양하고 소규모 업체들도 많아 다방면의 영업활동이 요구되긴 했다. 

그럼에도 6명이라는 숫자는 과했다.  


몇일 지켜보니 나를 포함한 3명은 언제 나가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가 입사하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먼저온 차장이 퇴사를 당했다. 그 역시 경력이었지만 업종이 달라 업무파악이 느렸던 것이다. 1명이 나갔으니 나와 포지션이 겹치는 동료가 남았다. 대표는 그를 공공연하게 해가 된다고 규정했으나 4년을 다닌 고인물로 내 쫓지는 못했다. 다들 그는 스스로 그만 둘 거라 여겼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를 맡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버텨내었다. 그가 버티면 내가 득이 되는 직원의 범주로 들어가기 어렵다.


"자네 지금 어떤 업무 하고 있어?"

그는 1주간의 일본 출장을 하루 앞두고 나를 불러 질책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는 나를 말로 때리고자 함이기 때문에 그냥 맞고 있어야 빨리 끝날 거란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대표실 문밖을 나서는 나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직원들은 눈치를 살폈다. 약간의 수치심이 몰려들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문제는 GO 아니면 STOP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사실 2주전에도 그만두겠다고 통보를 했었다. 그때도 몇일 연속 질책을 받들어야 했던 시기였고 절반의 붙잡을 거라는 예상을 염두에 두었었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미련없이 나가겠다 마음 먹었다. 예상대로 그는 나를 붙잡았고 나역시 못이기는 척 붙들렸다. 그때는 서로 버리기에는 아쉬운 그런 어중간한 마음이 있었다. 


퇴사하는 것으로 90%기울었지만 여전히 10%의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아쉬움이란 이제 겨우 새로운 환경에 적응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0%가 사라지는 계기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그날 오후 그가 다시 나를 불렀다. 

차라리 육두문자를 뱉어내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그의 질책은 길고 느렸다. 딱 꼬집어 잘못한게 없다 보니 그는 틈틈이 시간을 두고 질책할 내용들을 머리속으로 정리했다. 

그 모습도 서글프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건 대부분의 결정사항들은 그의 승인을 득해야 하는 구조인데 장기 출장을 하루 앞두고 있다보니 다수의 직원들이 승인을 받기 위해 문밖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앞으로 지금까지 어떤 업무를 했는지 그리고 어떤 업무를 할건지 매일매일 문서로 작성해서 보고해"


나는 자리에 앉아마자 업무보고서 대신 업무인계서를 작성했다. 그 긴시간 온갖 소리를 다들었지만 서운함 보다는 그의 강력한 질책에 10%의 아쉬움을 완전히 삭제되어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앞섰다.


"간단하게 업무 인계서를 작성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4개월의 짧은 기간, 업무 인계는 A4한 페이지에 빠르고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근무기간이 짧아 2~3일이면 업무인계는 충분 할 겁니다. 그리고 사직서는 00이사에게 제출 하겠습니다"

그는 한동안 업무 인계서를 살펴 보곤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


줄곧 영업업무를 하다보니 대표들과 동행하고 대면하는 일이 많아 그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다. 그들이 하루하루 얼마나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지도 알고 있어 악한 감정 보다는 연민이 앞선다.


다음날 그는 일본으로 출장을 떠났다. 얼마되지 않는 업무 인계를 시작하였다. 협력보다 경쟁관계가 더 짙은 팀원들의 얼굴에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고 느낀건 나만의 착각일까?

업무 인계가 마무리 되고 00이사에 사직서를 제출 하였다. 다들 그동안 고생했다는 따뜻한 말을 건냈다.

매번 느끼지만 직장은 헤어질때 비로소 아름다운 곳이 된다.


그여전히 출장중인 그에게 금일부로 업무 종료하겠다고 문자를 발송했다. 혹시나 한번더 생각해보라든지 귀국해서 다시 얘기하자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도 수고했다는 답신을 받았다. 여전히 10%의 마음이 남아있었나 보다 시원섭섭한 감정이 몰려왔다. 그렇게 나의 6번째 회사 생활은 과감하면서도 허무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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