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술문화 속 도깨비 스토리
도깨비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래동화에서, 혹은 할머니 무릎 밑에서 새근새근 잠들며 들었던 도깨비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뭐든지 불러내는 신비한 능력부터 인간에게 속아 혼쭐나는 익살스러운 면모까지, 도깨비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친숙한 존재이다. 도깨비는 옛날이야기뿐만이 아니라 미술에서도 표현되며 그 모습은 무궁무진하다. 특히, 불교미술의 경우 법당 내외부에 그려진 벽화와 석탑 부조상 등 다양한 장에서 확인되는데 ‘요괴(妖怪, Monster)’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환하고 해학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제1화 : 한국 도깨비의 불편한 진실
'도채비', '독각귀', '돗가비'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도깨비는 민간신앙에서 믿어 초자연적인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각종 민담(民譚)에 인간이 쓰다가 버려진 물건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도깨비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하며, 도깨비가 이동할 때의 모습이라고 알려진 도깨비불부터 한밤 중에 갑자기 들리는 사발 깨지는 소리, 기왓장 떨어지는 소리 등 일정한 형체가 없는 비가시적인 현상도 큰 범주에서 도깨비라고 칭하고 있으니 우리 조상들은 항상 도깨비와 공생한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깨비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아마도 부리부리한 얼굴에 정수리에는 큰 뿔이 달려있고 손에는 커다랑 방망이가, 허리에는 호피무늬 속옷을 두른 모습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보던 동화책부터 애니메이션,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접한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가 사실은 도깨비가 아니라면 믿겠는가? 그렇다. 우리가 인식하는 도깨비는 고유의 도깨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전통 도깨비는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소리와 자연 현상으로 전해진 사례가 대부분이며 일부 모습이 기록된 이야기에서는 패랭이를 쓰거나 더벅머리를 한 머슴 형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는 어디서 온 것일까? 바로, ‘오니(おに)’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문화에 등장하는 일본 ‘악귀(惡鬼)’의 총칭이기도 한 오니는 붉은 몸에 털북숭이, 정수리에 난 뿔이 가장 큰 특징인데 현재 우리나라 대중매체에 표현되는 도깨비와 굉장히 흡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민속신앙에서 비롯된 오니는 재미 삼아 내기를 하거나 악당을 골탕 먹이는 장난꾸러기 이미지의 한국 도깨비와는 상반되게 인간들을 해하는 절대 '악(惡)' 그 자체로 인식된다. 일본 민담 속에 등장하는 오니는 민가를 습격해 백성들을 잡아먹거나 흡혈(吸血)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그려지곤 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인 <귀멸의 칼날> 속 '혈귀(血鬼)'가 바로 오니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존재로 알려져 있다.
아니,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도깨비가 전부 가짜였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도깨비가 일본 요괴에게 자리를 빼앗겼단 말인가?! 오니가 도깨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배경에는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가 담겨 있다. 때는 1915년,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로 국권을 강탈당한 조선은 본격적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라는 강압적인 정책을 펼친다. 1910년대에시행된 무단총통치기에는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라고 하여 군인들이 치안을 담당하게 하여 조선인들을 총칼로 위협하였고 언론은 물론이요, 사사로운 표현의 자유마저 통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육은 어땠을까? 물론, 학생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일제는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우리 고유의 교육기관인 서당을 비롯한 사립학교들을 모두 폐쇄하였고, 일왕에게 충성할 것을 강조하는 교육제도로 탈바꿈해버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 도깨비가 일본 오니로 교체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일본식 교과서의 영향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족문화 말살을 위한 교과서를 발행했는데 그 내용에 실린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고부도리지이상(こぶじいさん)’, 즉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혹부리영감’이다. 교과서에 실린 삽화에는 ‘우치데노코츠지(打ち出の小槌)’라는 도깨비방망이를 든 오니가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본 아귀는 서서히 우리 문화에 고착되어가기 시작되었고 불교미술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무려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조선왕실 사찰인 서울 '흥천사(興天寺)'에 봉안된 '감로도(甘露圖)'는 극락에 가지 못해 떠도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인데 여기에 표현된 '아귀(餓鬼)'의 모습을 살펴보면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 속 아귀와 매우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불교미술 주제인 감로도 이미지도 당시 일제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니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항구도시인 부산과 군산, 목포 등을 방문하게 되면 이질적인 형상을 지닌 불상과 건축 양식 등을 볼 수 있다. 전남 목포 유달산(鍮達山) 절벽에 '마애불(磨崖佛)'로 제작 일본 스님상과 일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전북 군산 동국사(東國寺) 대웅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새로운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되었던 항구도시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당시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가 확고할 것으로 여기고 정착해 자신들이 믿은 신상을 제작한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일본 불교문화의 현지화를 시도하였던 식민지 시대의 가슴 아픈 흔적인 것이다.
이렇듯, 오니로 굳어진 도깨비 형상은 광복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고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물론, 1970년대 부터 여러 학자들이 도깨비의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 진행하였고, 비약적인 성과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그렇다면, 위 노력의 결실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바로 지금이다! 지난 2016년부터 2017년까 방영된 tvN 드라마 <도깨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인 공유와 이동욱이 주연을 맡아 주옥같은 명대사와 중독성 넘치는 OST 등 수많은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 결과, 무려 20%가 넘는 성공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얼마 전 일본으로 수출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물론, 전통문화 속 도깨비가 공유와 이동욱처럼 미남형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고유 단어인 '도깨비'를 해외로 알리는 큰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이다.우리의 오랜 친구 도깨비, 한류(韓流)가 세계문화의 중심이 된 현재, 도깨비를 되찾기 운동을 다시 할 수 있는 시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바로, 자랑스러운 K-컬쳐 중 하나인 ‘K-요괴 도깨비’로 말이다.
※ 제2화에서는 한국 고대미술에 표현된 도깨비 문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