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기사와 사토시의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을 읽고, 책과 이야기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를 읊고 있으면 내게도 차마 잊지 못할 그리운 그곳이 떠오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잊지 못할 그리운 추억의 장소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텐데요. 당신의 그곳은 어디인가요?
읽는 내내 다시 가고픈 그곳과 그리운 사람을 소환해낸 책이 있습니다.
출간 13년 만에 영국과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책으로, 2024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야기사와 사토시가 쓴 장편 소설,
입니다. 2009년 제 3회 치요다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2010년 휴가 아사코 감독에 의해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된 작품인데요.
이십년이 지났지만, 번화한 도쿄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고즈넉한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딸과 함께 거닐던 추억과 헌책방에서 맡은 책 향이 생생하게 살아난 멋진 시간을 제게 선물한 힐링 소설입니다.
“나는 여름이 시작된 때부터 다음 해 이른 봄까지 모리사키 서점 2층에 있는 빈방에서 책에 둘러싸여 지냈다. 해가 잘 들지 않고 비좁은 데다가 헌책들의 곰팡내까지 떠도는 방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곳에서 보낸 날들을 잊은 적이 없다.”
주인공 다카코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고서점 거리로 유명한 일본 도쿄 간다의 진보초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데요. 스물다섯 다카코는 외삼촌의 권유로 자의반 타의반 이 거리에 있는 헌책방 모리사키 서점에서 일하게 됩니다.
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 온 주인공이 첫 날 마주한 사토루 외삼촌이 운영하는 헌책방은 낯섦 자체였습니다. 지은 지 30년은 훌쩍 넘을 것 같은 목조 2층짜리 서점의 작은 공간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게다가 신경을 자극하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는 곰팡내처럼 거부감마저 들게 했는데요.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 다카코는 그 해 여름에서 다음 해 봄까지 한 해를 보내며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맞이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비일상의 순간들은 우연히 찾아오는데요. 외삼촌이 운영하는 근대문학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헌책방 2층에서 지내게 된 다카코에게 그 순간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밤에 찾아옵니다.
“그날 밤은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묘하게 격해진 감정은 밤중이 되어도 가라앉질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교차하면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p.59)
지난 아픈 기억과 앞으로 삶에 관한 고민으로 잠 못 이루던 그날 밤에 눈앞에 쌓여있는 책 더미 가운데 눈을 감고 손을 뻗어 꺼낸 한 권의 책 ≪어느 소녀의 죽음까지≫라는 문고본으로 인해, 주인공의 일상은 그 책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그 감동을 다카코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책을 통해 이런 멋진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왠지 지금까지 인생을 손해 보며 산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더 이상 게으르게 자고 또 자는 짓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외삼촌과 번갈아 가며 가게를 보면서 내 방에서든 카페에서든 책을 읽었다.”(p.64)
진보초 고서점 거리 작은 헌책방에서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책 한 권으로 마음의 문을 연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과도 소통 하며 지내게 되는데요. 서서히 그곳에 스며들며 상처를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출간 13년 만에 묻혀있던 서가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 30개국에 판권을 수출하고 꾸준히 번역 출간되고 있는 힐링 에세이.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은 또한 독자들이 지닌 아픈 기억을 치유하고 삶을 이끌어 갈 원동력을 선사할 것입니다.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철학자이자 작가 페터 비에리는 저서 ≪교양수업≫(은행나무, 2018)에서 이렇게 주장하는데요. “문학작품의 독자는 좀 다른 것을 배웁니다. 인간의 생각, 의지, 감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문학을 읽는 것은 영혼의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p.27~28)
페터 비에리의 주장에서 야기사와 사토시의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이 출간 후 10년이 넘는 세월을 독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탄생할 수 있었던 저력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복합성을 지닌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일반화하지 않고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잔잔하면서도 깊은 영혼의 언어를 선사하는 문학적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그저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데…….” 외삼촌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 인생은 가끔 멈춰서 보는 것도 중요해. 지금 네가 이러는 건 인생이라는 긴 여행 중에 갖는 짧은 휴식 같은 거지. 여기는 항구고 너라는 배는 잠시 여기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일 뿐이야. 그러니 잘 쉬고 나서 또 출항하면 돼.”(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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