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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귀분 Aug 04. 2023

가망 없나?

    같은 반 정숙이가 다가와 노려보며 말했다. “너 옷이 그게 뭐냐?  교복을 입어야지. 바지 위에 치마는 또 뭐냐? 못 봐 주겠다.  창피하다. 이 거지 야” 얼떨결에 거지소리를 들은 나는 “뭐? 거지?” 화가 치민 나는 머리 가락이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뜨내기 신입생인 나는 원주민 24명 여자애들에게 몰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참느라 종일 힘들었다. 그때. “피난민”이라는 단어는 ”거지”라는 뜻 이었다.  


    공산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폭격을 피해 Y읍 시골에서 피난살이를 하든 우리 가족은 집도 절도 없었다. 부잣집 문간방에서 다섯 식구가 배급품을 타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피난살이 동안 나는 2년이 넘도록 학교를 쉬고 있었다. 교회 친구가 교복을 입고 날마다 집 앞을 지나갔다. 몰래 훔쳐보던 어느 날, 나는 친구의 학교가 궁금해서 살금살금 뒤 따라갔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교실로 다 들어가고 텅 빈 운동장 계단에 나만 남았다. 칼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합창처럼 들리고 새떼도 무리 지어 날아가는데 나는 교실에도 못 들어가고 왜 혼자 있나? 서러워 눈물이 났다.


   호루라기를 걸친 선생님이 다가왔다. “얘 야! 너 왜 여기 있냐? 학생 아니냐?” 선생님의 물음에 서러움이 복 받친 나는 울기 시작했다. “교무실로 가자.  많이 춥다”. 나는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남루한 차림의 나를 살피던 선생님은 몇 가지를 물어보셨다. 나는 서울에서 온 피난민이고 D여중 일학년을 입학했었다고 했다. ”학교가 다니고 싶으냐?” 선생님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또 울었다. 체육 선생님은 나를 한문 선생님에게 데려갔다.


    사는 곳 주소. 다니던 학교이름. 부모 님 이름을 한문으로 써 보라 하기에 거침없이 쓰고 나니 신문을 주시며 어려운 단어가 많은 사설 부분을 읽으라고 하셨다. 그때 신문은 한문이 많아 중학교 신입생이 신문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놈 봐라! 합격! 너는 2학년이다!” 선생님은 기분이 좋으신 듯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졸지에 한 학년을 월반을 해서 난리통에 잃어버린 2년중에 일년을 회복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초등학교 일학년이었든 나는 귀국 일정의 지연으로 삼학년에 입학해서 생 고생을 했는데 또 월반을 했다.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 기쁘지만 수업을 못 따라갈 가봐 앞이 캄캄했다.  


    서당훈장 하시던 동네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한문을 무료로 가르쳤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한문을 배웠다.천자문.동문선습. 소학. 대학까지. 다섯명이 였던 학동이 얼마 안 가 나 혼자 남았다. 할아버지가 신촌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도 할머니가 차려주던 따뜻한 점심과 신동이라는 할아버지의 폭풍 칭찬이 너무 좋아 일년을 더 다녔다. 돌아올 때 화신백화점에서 승강기를 타고 놀았다. 


   그날. 선생님들은 다 수업에 들어가고 한문선생님과 체육선생님만 교무실에 계셨다. 가장 자신 있는 한문 시험을 보다니. 한문 한 과목 시험으로 선생님들 사이에 공부 잘 하는 서울 아이로 소문이 나버린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마다 이름을 부르고 “대단한 놈이 너냐?”하고 선을 보셨다. 나는 나날이 꿈을 꾸듯 행복에 취해 초라한 옷 차림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를 거지라고 했던 정숙이는 그 지역 은행 지점장 딸이었다. 차르르 흐르는 귀티나는 교복과 구두. 학용품도 책가방도 일본제였다. 특권의식에 콧대 높던 김정숙은 갑자기 나타나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는 거지 같은 아이가 싫고 미웠겠지. 더러운 오물을 보듯 나를 보던 그 아이. 기워 신은 내 운동화를 혐오스럽게 내려다 보던 그 도도한 눈길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학교에 다니는 나날이 꿈만 같아 남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으로 황폐한 세계 최빈국의 피난민 아이. 여자아이들은 입을 줄이려고 부자집에 식모나 애 보기로 주어버리던 시절. 농촌에서는 부농이라도 여자는 중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교복은 검은색에 흰 카라만 달았다. 장날이면 드럼통 밑에 불을 지피고 군복에  물을 들여 깃발처럼 장대에 매달아 놓고 팔던 시절. 어머니는 군복으로 교복을 만들어 주었다. 내복도 못 입고 4키로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바람을 막으라고 검정색 인조치마를 바지위에 덫 입혀 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녔다. 지금은 겹쳐 입는 것도 멋이지만 그때는 꼴불견. 김정숙이 거지라고 할 만도 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삼 년 장학금을 받고 고등학교는 갔지만 교복은 엄두도 못 냈다. 졸업생 선배가 준 낡은 교복을 기워서 입었다. 나는 일년에 몇차례 씩 경시대회를 나갔다. 그때마다 선생님 명령으로 부자 집 딸 권O숙과 옷을 바꿔 입어야 했다. 친구의 교복을 바꾸어 입는 그 일이 정말 싫었다.  O숙이는 얼마나 싫었을까? 친구에게 미안하고 자괴감 모멸감에 움츠려 들었다.  예쁘고 착하고 공부까지 잘 하던 O숙이는 낡은 내 교복과 일년에 몇 차례 씩 바꿔 입으면서 한 번도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남루한 교복을 입고도 당당했다. 교복때문에 주눅이 든 적도 없지만 민감한 사춘기 때 장학생답게 모범생이 되려고 더 노력했다. 지금도 모교 역사관에 1950년대. O숙이의 예쁜 교복을 입은 내가 시민회관에서 상을 받는 모습이 일간지에 실린 추억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60대 중반 미국으로 떠날 때 살림살이를 정리하면서 옷 방에 가득하던 옷을 다 기증하고 여행가방 하나에 속옷만 들고 갔다. 옷은 절대 사지 않겠다 다짐했다. 미국 동부에 오는 한국관광객이 반드시 들르는 유명한 우드 버리 몰이 사는 동네에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구경만 하겠다는 결심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십여 년을 살면서 허기진 사람처럼 옷을 사 날랐다. “명품인데. 너무 싸고 예뻐서. 놓칠 가봐” 핑계도 갖가지였다. 


    우리 몽촌 수필에 블랙이 잘 어울리는 작가가 몇 있다. 블랙이 어울리는 사람은 세련된 사람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색채 전문가가 찾고 찾아 낸 아름다운 색 이 블랙이라 하던가?  나도 백발을 휘날리며 블랙 컨셉으로 좋아하는 배우 윤여정의   개성 미 넘치는 캐주얼 룩을 흉내라도 내 볼까? 또 병이 도지려 한다. 이 병은 아주 오래된 난치병이다. 나는 아마도 어렸을 때 옷에 대한 결핍이 트라우마로 남아 병이 깊어진 것 아닐까? 


    사람들은 유행이라는 흘러가는 물결에 발이라도 담그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 급하게 만들어 입었던 나뭇잎 치마 같이 순간에 말라서 먼지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세상 것에 뒤지지 않으려고 숨가쁘게 살았던  젊은 날이 허망하고 부끄럽다.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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