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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Dec 21. 2023

"다음 주에도 꼭 상담 와야 해요."

기어이 오겠죠. 기어이 그러겠죠.

벌써 24회차다. 반년간 진행된 상담. 많을 땐 한 회차에 한 페이지가 넘도록 무언가를 기록하시던 선생님께서 요즘은 몇 줄 적지 않으신다. 그동안 뭐가 변한 걸까.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적을 게 없는 걸 보면 뭔가 바뀌긴 했나 보다.


저번 상담과 이번 상담 사이에 대학 수시 합불이 발표됐다. 수능을 완전히 망쳐버려서 유일한 희망이 수시였는데, 처참한 결과를 얻었다. 한 풀 더 꺾인 삶에의 의지.



엄마한테 모든 게 다 미안해요. 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더 건강한 애가 태어났어야 했는데. 20년 열심히 키워놓은 애가 요절할까 봐 걱정해야 되잖아요 우리 엄마는.
OO 씨가 못 죽는 가장 큰 원인이 엄마인 거죠?
네. 저는 불행해도 엄마만 행복하면 됐어요. 그래서 전 제가 죽든 말든 상관이 없는데, 아니 사실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우리 엄마는 어떡해요...
엄청 슬프시겠죠. 그리고 저도 엄마니까, 엄마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OO 씨가 어머니께 안 미안해하셨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어머니가 고마워하셔야 할 것 같아요. 엄마 때문에 올 한 해 안 죽은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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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쓸데없이 절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들 저랑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들 죽지 말라고 그래요. 같이 힘들어해 주고 안타까워해 주고.
나쁘지 않은데요? OO 씨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살아갈 이유가 바로 주변인들이었네요. 만약 OO 씨가 죽어도 아무도 안 슬퍼하고 세상이 완전히 그대로면, 그것도 그것대로 슬프지 않을까요?
근데 이미, 주변인들 때문에 죽지 못해 사는 걸 경험한 이상, 주변인들은 뭐랄까.. 짐 같아요. 제가 죽든 말든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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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가 행복해지면 좋겠죠. 근데 안 되니까. 말도 안 되는 거창한 꿈같아요. 그래서 제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못 죽어요. 저는 다음 주 이 시간에 두 다리로 걸어서 또 여길 오겠죠.
두 팔 벌려 환영할게요.
선생님도. 선생님도 절 기다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슬픈데요. 기다릴게요.
왜요...
다음 주에도 꼭 와요..... 

오겠죠. 기어이 오겠죠. 정말… 마음에 안 드네요. :/



결국 오늘은 최장시간 상담이 이어졌다. 원래는 50분인데 오늘은 80분이 넘었다. 왜 나 같은 것의 죽음에 타인이 힘들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당연히 안다. 근데 모르겠다.



우울증을 앓았던 이가 했던 강연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말이 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부주의한 관광객이에요. 나는 내가 있었던 곳을 전부 알지 못할 거예요.


맞아.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내가 힘든지 아닌지도, 진정 죽을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쉬운 것도 모르는 나에게 화가 나고, 우울증 환자로서 당연한 현상에 화를 내고 있는 나에게 또 화가 난다. 자기혐오의 무한 굴레이다. 정말 우울증은 ‘우울’이라는 단어 뒤에 그 몇 백배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를 더 이상 넓히지 않기로 했다. 나로 인해 잠재적으로 상처받을 사람만 늘어난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모질게 굴어서 날 떠나게 해야 할 것 같다. 아주 기만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내가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계획을 실행하기가 더 쉬웠을 테니. 얇지만 질긴 목숨을 굳이 연장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만물에 미안한 느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과 나는 맞지 않는다. 내가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 탓이 아닌 것도 안다. 굳이 따지자면 잘못은 내가 아닌, 세상 혹은 운명 쪽에 있다. 그래도 이런 비이성적인 사고가 날 떠나지 않는 건 내가 우울증 환자라서이다.



인간이란,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삶에 의미가 없이 살아가는 게 죽기보다 고통스러운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강하다. 나 역시 인간이라, 제대로 모순덩어리이다. 나는 스스로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며, 이는 주변인들에 의해 교차검증된 사실이다



그 예시로, 오늘 있었던 일을 들어보겠다. 정시, 즉 수능 결과와 관련한 상담이 있었다. 1년간 다녔던 재수종합학원의 담임 선생님을 한 달 만에 뵈었다.

2월 말에 개강해서, 4월 초부터 선생님께 정신질환 관련한 호소를 끊임없이 해대는 학생이었다. 9월부터는 다른 학생들보다 서너 시간씩 (그것도 매일) 일찍 귀가하곤 했다. 주말 자습은 당연히 불참.



오늘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선 내가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렇게 나간 학생들도 많다고. 그러니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며, 무조건 잘 될 거라고. 그런 감사한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나 감사한 동시에 운명이 야속하다. 제발 내가 나를 좀 포기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든 버틴다. 어떻게든 살아낸다.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버렸다. 내가 실제 그런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약한 사람이었다면 20년을 꿋꿋이 살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버티지 않아도 되는 걸 버티는 나 자신이.

살 용기도 죽을 용기도 없는 이 상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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