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 Jan 01. 2024

우울증 환자의 일기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한다.‘

2023년에 썼던 일기의 일부를 가져와 봤다.

(참고: 그 해 봄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



6월 5일

우울해요 우울해. 왜 우울한지도 모르겠어. 쳐진 내 목소리가 짜증 난다. 힘든 척하는 것 같아서.​

.

.

.

6월 8일

내일은 울지 않고 씩씩하게 공부 잘할 수 있길. 나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내려놓을 수 있길. 오늘보다 평온해지길. 마음이 조금만 덜 아프길.

.

.

.

6월 13일

죽음에 미련이 없어진다.

.

.

.

6월 20일

다 포기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꿈 많고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왜 되찾으래야 되찾을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애써 외면한 채 허구한 날 좁디좁은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어야 하는데.

.

.

.

6월 26일

난생처음 공황을 경험해 봤다. 병원 예약을 앞당겼다.

.

.

.

6월 28일

서럽다. 울고 싶고 다 그만두고 싶다. 나는 수업 하나 끝까지 집중하는 것도 어려운데 주변 애들은 쉬는 시간에도 펜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세게 치고 싶다. 근데 보는 눈이 많아서 못 한다.




7월 2일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해지게 해 주세요.

.

.

.

7월 5일

내 옷차림도 싫고 내 영어 발음도 싫고 샤워하기도 귀찮고 사람들도 다 싫다. 내일 모의고사라서 더욱 짜증 난다. 짜증이 안 나는데 짜증 나는 척하는 것 같아서 또 짜증 난다.

.

.

.

7월 6일

이딴 점수를 받아놓고 뭐 잘했다고 지구의 산소를 낭비하나 싶다.

음.. 참 쓸모없게 느껴진다. 나도. 그간의 내 노력도.

.

.

.

7월 11일

인간은(나는) 왜 이렇게 삶의 이유에 집착할까. 이유란 거 없이 그냥 살지 좀. 왜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이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음에도 죽음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고통을 수반하는가.

.

.

.

7월 24일

내가 미치도록 갈망하던 행복, 희망, 꿈, 발전 모두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행복해지면 뭐가 좋은데? 희망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의욕과 발전에 대한 열망으로 이글거리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의욕에 대한 의욕마저 없다.



8월 4일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할 이유조차 모르겠다.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한다.

.

.

.

8월 15일

엄마가 너무 걱정하시길래, 나는 엄마 때문에라도 살아갈 거니까 걱정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못 했다. 왠지 더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았다.

.

.

.

8월 21일

조퇴는 밥 먹듯 하고. 집에 오면 경주를 마친 마라토너처럼 마음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풀썩 누워서 골골대고 징징댄다.

​살아가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

.

.

8월 23일

이제부터 내 목표는 ‘완주’다.

2024년 12월 31일까지는 무슨 수가 있어도 살아보자는 다짐, 구겨서 멀리 던져놨지만 괜히 한 번 펼쳐 본다. 내 주전공은 극복이니까.

.

.

.

8월 25일

엄마, 이런 삶도 저런 삶도 있는 거야.

.

.

.

8월 27일

내 귀에는 사람들의 고통의 울부짖음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니, 혹시 다 내가 내는 소리들인가?

.

.

.

8월 28일

마음이 또 아프다.​ 공부를 하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못 하겠다. 집에 가고 싶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 살아갈 엄두가 안 난​다. 상담선생님이랑 하루종일 얘기하고 싶다. 아니면 큰 병에라도 걸려서 스위스에서 안락사하고 싶다.

.

.

.

8월 30일

심장에 뭐가 얹힌 것처럼 너무너무너무 답답하고 막막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2023년의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