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타칭 금손인 저는 요리에 있어서는 하위 5%의 똥손이기에 요리전쟁 글에서만큼은 제 주제를 파악하여 스스로를 '소인'이라 칭합니다.>
소인, 학년말에도 아이들을 향한 열정만큼은 마치 아랫목 장판을 그을리게 하는 온돌방의 화력에 맞먹습니다.
그리하여 종업식이 있는 마지막주는 교과서 없이 활동 중심의 수업을 했는데 아이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것이 바로 알뜰시장!
동네의 큰 공원에서 열리던 아나바다 장터가 코로나로 인해 몇 년째 개최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소인의 알뜰시장 활동은 우리반 아이들의 기대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혹시나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집안의 귀한 물건을 집어 오면 어쩌나? 어린 날의 나는 그런 아이였는데..' 염려되었던 소인은 아이들에게 제발 본인의 것만 가져오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부모님께도 취지를 알리는 단체문자를 보냈습니다.
다음날 A4종이를 접고 잘라 만든 소총 몇 자루(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던지 모든 남학생의 관심을 끌었으나 무엇도 발사되지 않음이 증명된 후에야 판매가 허가되었습니다), 교실에서 만들었던 디폼블록, 머리핀, 수첩, 작은 장난감, 보드게임, 인형 뽑기에서 뽑은 작은 인형, 스티커, 아이돌 포토카드, 이미 읽은 책 등 소소하고 귀여운 것으로 교실이 가득 찼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친구들의 물건을 살피던 한 아이가
"선생님! 김서방이 맛술이랑 카놀라유를 들고 왔어요!"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아이들의 눈은 순간 왕밤만 해졌고
"니 물건을 가져와야지!"
"이런 거 갖고 오는 거 아니었다고~"
훈수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시선집중에 김서방은 당황하여
"아! 이거 엄마가 선물 많이 들어왔다고 가져가라 해서 갖고 온 거예요. 진짜 허락받았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 순간! 소인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요리장면이 스쳐 지나갔으니..
맛술을 냉장고에 보관하는데 왠지 유통기한을 확인해보고 싶어 병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중 이미 유통기한이 넉 달 가까이 지났음을 깨달은 겁니다. 털썩..
눈으로 봤으니 그것을 쓰면 안 될 터인데 소인의 요리실력으로는 그것을 썼을 때와 안 썼을 때의 맛차이를 예상할 수 조차 없는지라 '냉장고가 맛술의 신선도를 지켜주었겠거니..' 하며 그냥 쓴 것이었지요.
그런데... 김서방이 맛술을 가져온 것입니다!
소인은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허락받았으니 괜찮아요~ 어머니께서 좋은 취지로 보내주셨네." 여기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선생님이 사실 어제 유통기한 넉 달 지난 맛술로 음식했어요. 저 맛술은 선생님이 찜할게요!"
아.. 소인, 맛술은 챙겼으나 아이들의 동심은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일 년 내내 예쁘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재미있었던(철저히 아이들의 시선임을 밝힙니다.쿨럭..) 우리 선생님이 넉 달 지난 맛술로 요리하는 여자였다니..
좌상:소인의 구맛술 / 우상 및 하; 소인의 현맛술
하지만 김서방과 그의 어머니 덕분에 우리의 알뜰시장은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아이들의 물품이 적을 것에 대비해 소인의 사무용품과 채색도구, 블록 등을 충분히 풀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소인이 먹던 영양제, 읽은 책 등 부모님을 위한 물품도 추가하였기 때문이지요.
"자! 이거 선생님이 먹는 저분자콜라겐, 비오틴, 비타민C입니다! 조정석이 광고하는 브랜드에서 나온 거예요! 백원입니다!"라고 어느새 호객행위를...
며칠이 지나고 소인, 유통기한 넉넉한 맛술로 소불고기를 했습니다. 유통기한이 넉넉해서였는지 맛이 아주 일품!
가위로 대충 썰어 참기름 쪼르륵 넣어 밥비벼 먹어도 꿀맛이었습니다.
1. 소고기 500g 준비, 강판에 간 배 1/4개, 맛술 2숟가락, 매실액3숟가락,올리고당1숟가락,간장 7숟가락,참치액젓1숟가락,다진마늘1.5숟가락,생강가루 네 번 톡톡
2. 잘 버무려 냉장고에 잠시 보관
3. 식사시간에 양파, 당근 채 썬 것과 함께 후루룩 볶기
알뜰시장 때 우리반 임당이가 구매한 물건들..이 모든 게 가짜돈 천 원이 안됩니다.^^ 참고로 임당이는 이런 아이입니다.
https://brunch.co.kr/@005399036fad479/17
참고로 알뜰시장 방법을 소개합니다.(구독자도 얼마 안 되고 그중 선생님은 더 적겠지만 언젠가 이 글이 초등교사들 사이에 회자되며 브런치 인기글로 오를 것을 대비하고자..)
1. 판매물품에 붙일 가격책정표를 일인당 열 장씩 배부한다.
2. 판매가격은 100원부터 500원 사이로 정하되 총판매금액이 1,000원을 넘을 수 없다.(고로 모든 물품을 백 원에 판다는 가정 하에 일인당 가져올 수 있는 물품의 최대개수는 10개)
3. 한 사람이 구입할 수 있는 금액도 1,000원이며 실제 돈이 아닌 선생님이 제작해서 배부한 종이돈에 본인의 이름을 적어 구매한다.
4. 물건을 모두 진열해 둔 뒤 다 함께 구경하며 가장 사고 싶은 물건에 각자가 가진 한 장의 찜카드를 붙인다.(두 명이상이 붙였으면 가위, 바위, 보하기, 진 사람은 본인찜카드를 떼서 다른 물건에 붙인다)
5. 찜카드가 붙은 물건은 언제든 찜카드 주인이 살 수 있게 진열하고 나머지 물건을 반으로 나누어 반을 먼저 진열한다.
6. 모둠원 4명 중 두 명은 상인, 두 명은 손님이 되어 시장놀이 시작!
7. 상인, 손님 역할 바꾸면서 나머지 물건도 마저 진열한 후 시장놀이 다시 시작!
8. 남은 물건은 다 모아 선생님이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희망자가 구입!(희망자 없으면 백 원씩 할인!)
모든 물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팔렸고, 소인은 맛술! 오직 맛술 하나만 샀음을 밝힙니다.^^
시장놀이를 하면 상인과 손님으로 나눠야 하고 누가 먼저 손님이냐에 따라 사고 싶은 물건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에 아이들에게 '찜카드'를 하나씩 나눠준 것이 모두를 만족시킨 비책입니다. 하나쯤은 진짜 자기가 사고픈 걸 사야 하니까요.제가 맛술을 구매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찜카드 덕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