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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금 Oct 12. 2023

다 녹아버렸으면 좋겠어.

회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회사 탕비실로 가서 텀블러를 씻는 일이다.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로 들어가면 개수대에는 항상 성인 남자 손 크기의 얼음 조각 한 덩어리가 버려져 있다. 그 얼음 조각은 새벽부터 배달된 점심 도시락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아이스팩의 얼음이다. 아침 일찍 출근한 부지런한 어떤 동료 직원이 배달된 도시락 상자를 풀고, 그 안에 있는 불필요한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한 모양이다. 


개수대에 놓인 얼음은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녹고 있었다. 크기는 점점 작아졌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얼음의 가운데가 가장자리보다 더 빨리 녹아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텀블러를 씻기 위해 미지근한 물을 틀어 놓으면 얼음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녹아 하수구 구멍에 쏙 들어가 버린다.


크고 단단했던 얼음에 구멍이 생기고 빠른 속도로 녹아 물이 되는 과정을 볼 때면 이상한 희열을 느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당연한 인생의 진리가 새삼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영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얼음 조각에 대입해 본다. 나를 한없이 가라앉혔던 우울한 기운을, 나의 모든 일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허무함의 굴레를, 미래가 보이지 않아 체념과 포기만 늘어나는 나날을, 애써 부정했지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편협한 생각을, 얼음 조각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녹아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창문 틈 사이에 불어오던 따뜻한 바람에, 무심하게 틀어 놓은 미지근한 물에 얼음만 녹고 있지 않았다. 냉소와 편견, 우울과 무기력에 차가웠던 마음도 함께 녹고 있었다. 탕비실에 우두커니 서서 개수대에서 녹고 있는 얼음 조각을 보며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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