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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금 Jan 06. 2024

시간을 빨리 감을 수 있는 '마법의 실'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 인상 깊게 본 작품 하나가 있다. 도덕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었는데, 제목은 <마법의 실>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제목은 몰라도 줄거리는 대충 기억할 것이다. 고학년이 되어 세상 무서운 것 없듯이 행동하는 친구들도 수업 시간에 이 작품을 읽고 놀람의 탄성을 지른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마법의 실>은 12살 소년이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다. 나무 밑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던 12살 소년은 한 노인에게서 시간을 빨리 돌릴 수 있는 마법의 실을 받는다. 소년은 마법의 실을 받은 뒤 공부하기 싫을 때나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실을 조금씩 잡아당겨 그 순간을 피한다. 그렇게 조금씩 실을 당기니 금세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괴롭고 힘든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실을 당겨 고난과 위기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다 보니 소년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었고,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소년은 마법의 실을 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꿈이었고, 꿈에서 깬 소년은 매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하는 ‘마법의 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는 빨리 감기라는 버튼이 있으니 말이다. 각종 SNS, OTT 플랫폼에는 지루한 장면,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건너뛸 수 있게 하는 빨리 감기 버튼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시간을 뒤로 돌리지도 빨리 감지도 못하지만, 인터넷 세상에는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시간을 조종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 번 터치하면, 화살표 모양으로 된 키보드 자판 한 번만 누르면 원하는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다. 그뿐이랴 요즘은 누군가 친절하게 달아 놓은 타임라인(몇 분 몇 초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항목으로 정리해 놓은 리스트)이 있어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을 보지 않아도 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법의 실을 가진 소년은 예상보다 빨리 노인이 되었다는 부작용을 겪었다. 빨리 감기 버튼을 가진 우리에게는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그 부작용은 현실 세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반복되고 지루한 순간을, 먼 훗날 나를 성장하게 할 고통스러운 실패의 순간을 인내하고 감내하는 능력이 점점 부족해지는 것이다. OTT 플랫폼을 통해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불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혹은 주인공에게 위기가 드리워진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아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듯,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인생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고만 싶어진다.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순간이나 두렵고 힘든 순간을 건너뛰고 결국 해피 엔드를 맞이하는 주인공들처럼 환희와 기쁨만이 넘치는 그 순간으로만 하루빨리 가고 싶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인터넷 세상과 같을 수 없다. 인터넷 세상 속 모든 사진과 영상은 완성형으로 업로드되어 있지만, 인생은 현재를 살아가면서 하나하나씩 만들어지니까. 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인내하느냐에 따라 내 행복과 성공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질 테니까. 인생은 리플레이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니까. 하지만 빨리 감기가 되지 않는 인생은 인터넷 세상보다 특별하고 값지다. 빨리 감기를 하면서 보았던 인터넷 강의나 드라마,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인상 깊게 보았다고 생각한 장면들과 내용이 머릿속에서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휘발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땀과 눈물로 보낸 노력의 시간과 실패로 단단해지는 인고의 시간은 어떤가. 그 순간은 잊으려야 결코 잊을 수 없다. 고되고 힘든 시간을 버티고 이겨 냈다는 뿌듯함과 대견함, 자부심 때문이다. 그렇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은 똑같이 힘든 순간이 와도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나침판이 될 것이며, 어떤 도전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줄 것이다. 또 나만의 특별한 드라마와 영화가 될 것이다. 빨리 감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는 어느 명작보다도 더 멋진 명작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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