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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이월의 봄 Oct 31. 2023

가을 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독서기록 -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p.40 지난 여름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얼굴들이 쏟아졌다. 마음속으로 누군가들을 평가하며 여름을 보냈다. 여행지를 평가하듯이. 누군가의 장점을 찾아내는 데 탑티어급 재능이 있다. 장점을 조속히 발견하고 그 사람의 지배적 이미지로 설정한다. 그리고 사랑해 버림. 아무렇게나 사랑해 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사람들을 좀 더 겪어 본 사람들이 은밀하게 경고장을 제출해 온다. 그 사람의 좆같음에 대해 당신에게 고발합니다. 보통의 절차는 이런데, 아무에게도 고발당하지 않는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둘은 업계에서 20년 이상 일한 사람들이고, 공통점은 자연스러운 무드다. [유퀴즈]를 진행하는 유재석처럼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서 상대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호의를 남발하지 않는 선에서 호의적이었다. 농담을 곁들이며, 농담의 질이 좋으면 좋은 대로 후지면 후진대로 웃게 했다. 대화의 BPM을 편안한 속도로 디자인해 냈다. 무엇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모두들 그 자연스러움을 좋아했다. -친구의 일기, 권도은 중에서-


p.46 내 기준에서 세련된 소설이란 정서적으로 자만과 겸손이 절묘하게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너무 예민해야 하고, 사실은 정말 많은 하람들을 아울러야 가능한 일. by 이상우


p.83 우리는 서로 다르고 다름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결코 평행선에 두지 않으면서도 위험한 강으로 떠내려가게 내버려두지 않는 일. 그렇다면 우리 그러니까 인간은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진가라고 하는 질문들. 아마 답을 내릴 수 없고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걷어차면 안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도쿄의 안은별, The Stranger-




✍�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은 소설가 박솔뫼, 연구자 안은별, 소설가 이상우가 각각 서울, 도쿄, 베를린에 머물며 함께 공유한 글들의 공동 산문집이다. 이 글들은 사실, 2021-2022년 문예지 <릿터>에 [0시 0시 +7시]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들을 바탕으로 하였다.


같은 기간동안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담은 이야기들이, 마치 문구점에서 사먹던 색색깔의 별사탕 같다. 우산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던 알록달록한 별사탕들은 색깔도 다르고, 미묘하게 그 맛도 달랐지만, 우산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을 때 탐 나도록 빛이 났다. 다름에 충실하되,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이들처럼 말이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에는 공동 작업을 진행한 세 작가 외에도 친구들의 여덟편의 글이 더해져, 읽는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마치 내가 그들과 함께 글을 주고 받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한다.



책의 말미에는 ‘쿠키영상’처럼 세 작가가 작업을 위해 주고 받은 이메일과 사진들이 실려있다. 날것의 기록이 선사해주는 흥미와 설렘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일종의 공동작업 같은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일무이한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른 시간과 공간, 하지만 결국은 지구라는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걸음으로 살아간다.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도... 어쩌면 개인의 작업이자,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동작업일지도 모른다.


잔잔한 일상과 잔잔하지 않은 사유들이 담긴 친구들의 글을 마주하며, 10월의 가을밤은 기분 좋은 수다로 가득했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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