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 피플>을 읽고
<페스티벌 피플, 글 안젤라권>
p.6-7 프롤로그
다름에 대한 공감과 이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차별과 혐오의 낙인 없는 세상을 위해 우리에겐 서로의 다름을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합니다.
(중략)
모르는 건 두렵고, 두려움은 적대감으로 표현될 수 있다. 알아간다는 건, 이해한다는 건, 공감한다는 건, 존중한다는 건,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만들지 않는 힘이 있다. 서로를 알게 되면 쉽게 비난할 수 없다.
p.203 나는 진심을 담아 작품을 대하는 친구들이, 나의 동지들이, 일이 아닌 세상에, 사람에 상처받지 않고 긴 세월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할 수 있기를 매 순간 기도한다.
p.274 사진을 찍는 사람도, 공연을 만드는 사람도, 조형물을 만드는 사람도, 축제를 만드는 사람도, 모두 각각의 이유로 자신이 선택한 작업에 마음을 담는다. 같으면서 다른 우리는 각각의 이유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진과 공연, 사진과 축제, 사진과 책, 사진과 전시, 같으면서도 다른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하며 의지한다.
“누구에게나 한번 즈음은 축제와 같은 시절이 찾아온다”는 말을 나는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있었다.
안젤라 권은 <페스티벌 피플>을 통해 축제의 필요성, 축제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다름에 대한 공감과 이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페스티벌 피플>은 1999년 난타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 공연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한 그녀가 약 25년 동안 에든버러 축제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흔히 생각하기를, 예술가들은 개성이 강하다. 하여, 남들과 어우러지기 어려우며 고집불통이다-라는 나의 선입견은 <페스티벌 피플>을 읽으며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작품과 예술을 위해 모인 그들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했고, 연대하며 의지했다.
‘축제’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럿이 함께 할 때, 오롯이 축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즐길 수 있다.
<페스티벌 피플>은 단순히 축제의 당위성을 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축제의 현장을 기쁨과 아쉬움과 환희와 같이 별처럼 수많은 감정들을 녹여가며 누볐던 그녀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삶 또한 축제처럼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한번 즈음해보게 되는 이야기이다.
내 눈과 마음에서 다름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더하고, 차별과 혐오를 지워나간다면, 어쩌면 “한번 즈음은 축제와 같은 시절”이 찾아오지 않을까?
<가리는 손 / 김애란 지음> 소설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자리에 누울 때 벗는 모자처럼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우리는 축제에 함께 할 때, 기꺼이 품이 드는 '이해‘'를 위해 노력한다. 배우의 표정을, 몸짓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둔다.
우리나라 공연을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 축제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리고자 하는,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을 안고 살아가는 그녀 덕분에 우리의 삶 곳곳에 선한 영향력이 더해짐을 느낀다.
그녀의 글 속에서 함께하는 동료들에 대한 애정과 축제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존중하는 마음이 깊게 깔려 있다.
<페스티벌 피플>에는 총 10명의 피플(people)이 등장한다. 어쩌면 <페스티벌 피플>의 11번째 주인공은 책을 통해 만난 독자가 아닐까?
차별이 아닌 것을 가장한 차별, 혐오와 편견으로 얼룩진 마녀사냥, 오해를 부추기는 가짜 뉴스 등에 둘러 싸인 우리를 ‘축제’가 부른다. 품이 드는 ‘이해’를 함께 하며, 축제 같은 삶을 살자고.
<페스티벌 피플>이 되자고.
2023.10. 가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