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린이가 내게 물었다, 김소형 산문집]을 읽고
<오늘 어린이가 내게 물었다, 김소형 산문집, 북노마드>
몇 페이지 안 읽었는데 재미있었다. 나비잠을 자는 아가가 선물해 준 노란 책을 읽는 시간. 한번 맛보면 혀가 파래질 때까지 먹던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샀던 사탕처럼,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맛. 결국 여행지까지 들고 가서 읽었다.
책을 읽으며 영화 <더 웨일 The Whale, 2023>이 떠올랐다. (영화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 노랑 아기 나비가 앉아 있을 법한 꽃잎 같은 책장을 넘기며, 커다란 고래를 떠올렸다니.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화 <더 웨일>의 주인공인 찰리의 딸 엘리가 모비딕을 읽고 쓴 ‘에세이’의 한 구절이 떠오른 것이다.
"하먼 멜빌이 쓴 걸작 모비딕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중략)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됐다."
- 엘리가 8학년 때 '모비딕'을 읽고 쓴 에세이 중 일부-
<오늘 어린이가 내게 물었다>는 김소형 시인이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마주한 어린이의 세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내가 만나고 보아왔던, 어린이의 세계를 떠올렸다. 그렇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우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1. 우주인
첫 학교, 첫 발령, 첫 담임은 1학년이었다.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처음인 우리. 1년 동안 단추를 꿰어가며 얼마나 웃기고, 눈물 짠한 일들이 많았겠는가. 1학년 아이들은 맞춤법을 자주 틀렸고, ~했다요- 와 같은 화법도 독특한 그들만의 특성이었다. 나는 종종 그이들이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생명체 같았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떠올리며, 이따금 아이들과의 하루 속에서 실망하고 속상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우주인’을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 속에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또한 함께 있었다. (실제로 우리 반 아이들의 말과 글을 모아 ‘우주인 이야기’라는 UCC를 만들었고, 교육청 UCC 공모전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학교의 주인은 우리라는 이야기. 풀이 많아 '아풀이카'라는 귀여운 우주인들의 이야기였다.)
김소형 시인은 말한다.
p.17 아이들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아직 사람은 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 어린 친구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서는 쉽게 잊는다. 처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도 이들을 통해서였고 관심이 멀어진 것도 이들을 통해서였다. 여러분들은 이들과 반나절만 있어도 곧 이렇게 외치리라.
- 얘들은 도대체 왜 저러지?
<오늘 어린이가 내게 물었다, 김소형 지음>
이 구절을 읽으며 ‘우주인’이라 외치던 시절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 없기도 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이들에게 있기도 하다. 얘들은 도대체 왜 저러지? 싶지만, 내가 왜 이러지? 싶을 만큼 애정이 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2. 다른 우주인
이 책에는 시인 선생님과 존 스튜어트 밀과 마르크스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학생, 즉 아이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우주인들과 또 다른 우주인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최근까지 근무했던 곳은 작은 시골 학교이다. 학교 앞에는 그 흔한 분식점이나 문구점조차 없다. 아이들 중에는 대를 이어 학교 주변에서 터를 꾸려가며 할아버지, 아빠에 이어 본인까지 3대가 이 학교를 졸업한 경우도 있다. 책 속에는 종종 영어 유치원과 미국에서 한국을 오고 가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가 만난 우주인들과 꽤 먼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우주인들이다. 나는 이 아이들과 함께 하며 때론 배움보다 돌봄에 몸과 마음이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을 때도 많았다. 특히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아이들은 자주 외로웠다.
같은 학교에서 만났던 2학년 아이들 중 몇몇은 국어 교과서에서 나온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시로 나온 음식들을 보며 분류 기준을 알아야 했는데,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참치 김밥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해 보이는 제법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우리 반 아이는 참치 김밥을 두고, 참치 모양의 김밥이 아니냐고 내게 물었다.
글쓰기 학원을 보내줄 만큼의 경제력과 정성이 미약한 공간에서 아이들은 국가에서 제시한 교과서 내용마저 가끔은 동 떨어진 것처럼 느끼며 성장했다. 이 아이들과 내가 나눈 말들은 책 속의 그것과 달랐다.
그래도 나는 책을 보며 웃었고, 마음이 몽글하게 맺히기도 했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 다운,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된 모습들이 있었다. 조금은 엉뚱한 괴짜 철학자, 때론 본인이 시인인 줄 모르는 시인. 그저 딱 그 나이의 어린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총합이 되는 존재였다.
3. 그리고 선생님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고."
영화 - <더 웨일> 대사 -
선생님은 힘들다. 무관심할 수가 없어서.
갓난아이가 잠을 자주 깨도 힘들고, 잘 자도 엄마는 힘들다. 행여나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자꾸 깨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는 시간조차 무관심할 수가 없다. 눈과 마음이 자꾸만 향한다.
누군가에게 더듬이를 세우고 그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소통하며 서로의 세계를 엮어간다는 것은 퍽 어렵고 힘든 일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까먹었다. 나는 그를 김소형 선생님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민첩하게 반응해 주는 것. 품이 드는 멋진 사랑이다. 아이들은 글을 쓰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글에 반응해 주는 것이 좋아서 글을 쓴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이들의 말과 글, 그리고 함께 한 시간 속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세계를 이렇게 그러 모아 한 편의 책으로 지어준 작가님 덕분에 우리 시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p.232 요즘 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만들었다.
또한 공교육 현장을 떠올리며 마음이 묵직해졌다. 몇 문장으로 다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가득하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과 행복만으로는 이제 역부족인 것 같은 시대. 자신의 삶과 배움에 열의가 있어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선생님께 믿고 맡기는 부모님의 마음은 지금 이 시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왜 교실에서는 진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도록, 참다운 가르침이 사라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교사가 움츠러들면, 아이들도 움츠러든다. 아이들의 말과 글이 경직되고, 오늘의 어린이가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영화 <더 웨일>의 엘리는 소설 ‘모비 딕’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에세이에 적었다. <오늘 어린이가 내게 물었다>라는 ‘좋은 책’을 만났다. 그래서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팔랑팔랑 나비처럼 즐겁게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묵직한 고래가 된 것 같다. 어딘가로 헤엄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육아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는 아이들과 교실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잠시 멀어짐으로 주어진 고요한 평화를 생각한다. 오늘 내가 나에게 자꾸 묻게 된다. 어디로 가고 싶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