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을의 촌장의 딸이 참으로 어여뻐, 사자까지도 그 딸에게 반해 청혼을 했다는 동화이다. 비록 미녀와 야수처럼 로맨틱한 동화는 아니었지만, 내용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딸은 결혼이 싫어 울며불며 아비인 촌장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거절하면 사자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 시름이 깊던 촌장은 한 가지 꾀를 낸다.
촌장이 말하길, "우리 딸도 당신을 흠모하고 있으나 당신의 발톱이 너무 무서워 결혼할 수 없다고 하오. 당신이 발톱을 모두 뽑아 오기 전에는 우리 딸과 결혼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자는 정말로 발톱을 다 뽑아서는 재차 청혼하러 갔고, 촌장은 "내 딸은 당신을 흠모하지만 당신의 이빨에 잡아먹힐까 두려워 결혼할 수 없다고 하오. 당신이 이빨을 모두 뽑아오기 전에는 우리 딸과 결혼할 수 없소."라고 말했고, 사자는 정말로 제 이빨까지 모두 뽑았다.
이만하면 소위 말하는 찐사랑이다 싶은데, 촌장은 이제 당신의 딸을 달라는 사자를 몽둥이로 때려 눕힌 후 절대로 내 딸을 줄 수 없다며 쫓아내었다. 사자는 무척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이미 자신을 지킬 무기를 모두 잃은 뒤라 그대로 쫓겨나야만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동화를 읽을 당시의 어린 마음엔 사자가 참 불쌍하고 촌장이나 촌장의 딸이 참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동화는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자신의 공격성을 잃지 않기를 경고하는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공격성의 상실
이처럼 자신을 지킬 공격성을 뿌리부터 거세 당하는 일은, 내 주변에서 제법 흔했다.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사상은 부모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공격성을 '대든다'와 '불효'로 만들곤 한다.
나 역시 아무리 네가 옳다 할지라도 부모에게 정면으로 대들지 말라 교육 받았으며, 내가 내 자신을 지키려고 행동하면 괘씸하다는 이유로 더욱 심하게 혼이 나곤 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미성년자가 자기 자신을 지킬 공격성을 유지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난 우리 부모님이 날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견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때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나를 해칠 때,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었다.
문을 잠그는 소극적 방어에 대해서 문을 억지로 열쇠로 따고 들어오거나, 부숴버리기 전에 열라고 말을 들어 본 건 나 말고도 비교적 흔한 일일 것이다.
대들면 한 대 맞을 거 열 대 맞고, 경찰을 부르면 패륜 수준으로 생각하며, 힘으로 부모를 제지하면 이제 힘으로 이겨 먹느냐며 뺨을 맞는다. 이것이 나와 내 주변이었다.
설령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의 목적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떤 공격성도 허용받지 못하는 어린아이. 부모의 분노로부터 그 자신을 지킬 방법은 전무했다. 나는 그냥 그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을 버티는 법 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그 거세된 공격성은 사회에 나갔을 때에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난 나의 공격성을 모두 잃어버린 채 양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살았다. 난 웃으며 내 무해함을 어필하고, 상대의 분노를 풀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다. 사랑스럽고 무해해서 해치고 싶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분노를 그들에게 쏟지 못하니, 그 분노는 오로지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쏟아져 그대로 자기혐오가 되었다.
또한, 자신을 지킬 무기가 없는 초식동물과도 같은 내 자신을 알기 때문에, 나는 공격성을 가진 사람들이 육식수처럼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발톱과 이가 뽑힌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사회에서는 공격성을 문제점처럼 취급하지만, 공격성이 거세되면 사람이 비틀린다. 자기혐오와 회피가 극심해지고, 분노해야 할 것에 하지 못하다가 분노하지 않아도 될 것에 분노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한 회피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점이 항상 힘들었다.
더불어 내 이런 점은, 내가 무언갈 도전할 때에도 따라 붙었다.
어떤 일이 책임질 필요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면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만, 잘해야 하고 책임이 따르는 중요한 일일 경우 나는 그 일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무조건 회피하고 도망가고만 싶어졌다.
그래서 작은 일에는 두각을 드러내다가도 정작 그 일이 커질 기회를 얻으면 도망가곤 했다.
또한 그러면서도 남의 요구를 제대로 거절하지 못했고, 남의 실망을 과도하게 두려워했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지면, 조직생활이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의 일을 떠안게 되고, 실력이 있어도 큰 일을 맡지 못하며, 잘하는 것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이 내 회피에 실망하니 스스로 자기혐오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야 만다.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존재는 결국 남의 식탁 위에 오를 뿐이다. 나 역시 조직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랬던 기억이 난다. 실력이 많든 어떻든 간에,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남들에게 그저 호구일 뿐이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하루하루가 지속될지라도, 사실 내겐 집이나 조직이나 고통스러운 건 엇비슷했다. 그리고 난 그런 고통에 대비하는 방법을 단 하나밖에 허락받지 못했다. 그저 '버티는 것' 말이다.
결국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조직생활을 그만둔 나를 보고, 부모님은 자신이 날 잘 못 키운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빠는 내가 차라리 직장에 화를 내며 사직서를 냈다면 걱정이 안 되었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만 그 뒤로도 아빠의 태도가 별달리 바뀐 점은 없었다.
부모자식 간에도 공격성은 필요하다
위에서도 넌지시 말을 꺼냈지만, 아이가 자신을 지키기로 결정하는 첫 대상은 아마도 부모일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었다. 발버둥을 쳐 보기도 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질 뿐이었다. 부모의 뜻이 나를 짓눌러도 나는 내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난 항상 숨이 막힌 채로 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날 정말 사랑하신다. 아빠는 내게 주스를 직접 갈아주시고, 주말마다 도서관에 데려갔으며, 틈틈이 계곡도 데려가고, 포옹도 아끼지 않으셨다. 사랑한다는 말에도 박하지 않았다. 나를 잘 키우기 위해 부던한 경제적 노력 역시 기울이셨다.
엄마도 날 위해 어린 시절 동화를 읽어주시고, 내가 힘들다 하면 배려해 주셨고, 날 아기라고 부르시며 내 작은 선물도 항상 곁에 두셨다. 편찮으실 때에도 나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부모님의 정원수가 된 기분이었다. 난 부모님의 의지대로 손질하고,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정원수가 맞았다. 애지중지 길렀으나 본질은 결국 그렇다.
내가 부모님의 손질이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내가 뻗고 싶은대로 가지를 뻗겠다며 내 뜻을 주장하고 내 자신으로 살려고 하면, 부모님은 자신들의 경험을 빌어 내가 어리석고 철없으며 미래에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기엔 그들 역시 행복해 보이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나의 작은 꿈을 시작하면, 난 그 꿈이 참 사랑스러웠다. 부모님은 그 꿈이 부모님 마음에 맞으면 응원하고 지지해 주셨지만, 그것이 맞지 않으면 걱정을 닮은 독을 주입하시곤 했다. 난 그 독이 사랑과 함께 주입된다는 점이 참 괴로웠다.
뭐든지 시작은 서툴기 마련인데 그 서툶이 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음에서 오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그런 것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 하느냐 하시고, 부모님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답게 핀 꽃들을 이야기하시며, 자기 주변에 그 꽃을 피운 사람을 이야기하고 그 사람처럼 되라고 얘기하셨다.
그래서 난 항상 내 꿈이, 부모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내 자신이, 항상 하찮고 작으며 연약하게 느껴졌다. 거세된 공격성이 보일 때마다 부모님의 말이 더욱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부모님이 말씀하시고 내게 기대하는 바 역시 거대한 압박감이었으므로, 나는 부모님의 뜻에 맞춰 살지도 못하고 내가 원하는 꿈에 맞춰 살지도 못한 어중이 떠중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섭지만 나의 작은 꿈들을 최대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계속 가꾸었고, 제법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 정도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며, 남들은 너의 미래를 생각치 않고 단순히 칭찬할 뿐이지만 자신들은 나를 사랑하기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난 그래서 내가 항상 부족한 것 같았다. 남들은 일부로 키워줘도 못하는 것들을 해낸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부모님께 가면, 그것들은 순식간에 시간 낭비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나 끊임없이 키워 낸 나의 꿈은 결국 내 진로가 되었고, 부모님의 지인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부모님은 탐탁찮아 하셨으나 결국은 네 행복대로 살라 하시면서도 계속 걱정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꿈이 제법 번듯하게 자라 Tv에도 나오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자 아빠는 불쾌한 듯이 "넌 아빠랑 안 볼 수록 잘 되는 것 같다?" 라고 하시며, 내게 이리 말씀하셨다.
"너는 내게 감사해야 해. 내가 네 꿈을 이룰 만큼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었잖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온갖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나는 기가 차서 껄껄 웃었다. 아빠는 모르시겠지만, 아빠야말로 그 당시의 내가 공격성이 없던 것에 감사하셔야 할 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내게 자식의 도리를 바랐듯이, 나 역시 부모의
도리를 바랐었다.
부모라면 자신을 안 볼수록 자식이 잘 된다면 스스로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하며, 응원해주지 않은 꿈을 키운 자식이라면 자랑스러워하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빠는 내 성장을 서운해하고 자신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으면서, 악의조차 없는 순수하고 순진하기까지 한 마음으로.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함을 안다. 그러나 부모님이 날 사랑해서 한 일 중의 많은 부분이 내 공격성을 거세하며 내게 독을 들이붓는 일이었음도 인정한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함이 필수적인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것이 건강한 공격성인 것도.
나는 나를 기른다
공격성 외의 다른 부분에서, 부모님은 멋진 분들이셨다. 그러나 공격성에 대한 부분에서는 부모님이 날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날 기르기로 했다.
동화와 다르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난 나의 뽑힌 공격성을 다시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릴 때 뽑힌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계속 자라지 않도록 포기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공격성을 기르기 위해 길고양이의 성장을 생각했다.
고양이가 아주 어려 이빨과 발톱이 아예 없으면, 어미는 젖을 주어 이빨과 발톱을 기를 시간을 준다. 그리고 작은 유치와 발톱이 자라면, 죽은 먹이를 가지고 와서 뜯게 하고 고기의 맛을 보게 한다.
그렇게 고기의 맛을 알고 조금씩 발톱과 이빨이 강해지면 거의 죽은 것, 반 죽은 것, 살아있는 것 순으로 가져다 주며 야생성을 학습시킨다.
고양이가 처음 사냥을 할 때에 그 뒤에 어미고양이가 있고, 실패를 하면 사냥감이 고양이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키고 좀 더 잡기 쉽도록 사냥감을 다치게 만들어 재도전하게끔 한다.
저것은 '사냥감'이고 네가 먹어 치울 것이지, 무서워할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사냥에 이기면 저것을 물고 뜯고 즐길 수 있음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젖먹이 고양이가 자라서 날아오르는 새까지도 잡게끔 성장시킨다.이러한 교육을 받은 고양이와, 나서부터 집고양이로 자란 녀석들은 큰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나를 위하여 거대한 압박감이 들만한 큰 업무들을 아주 작게 소분하기로 했다. Ppt를 만들어야 하면 오늘은 피피티 양식만 고르고, 내일은 내용 조사만 하는 식으로, 하루에 1분만 해도 좋으니 무서워하지 않도록 갈갈이 찢어 쪼개었다.
부모님이나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언제 하느냐, 유약하다 할 지 몰라도, 그렇게 쪼개서 해내다 보면 나의 공격성이 전보다 강해지고 점점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됨을 오늘의 나는 알고 있다.
부모님과 세상은 내게 빠른 완벽함을 원하고, 맹수답게 가르치지 않으면서 맹수마냥 많은 사냥감을 가져오길 바랐으며, 단계를 지켜주지 않으면서 날 나약한 이로 여겼지만. 내 자신은 이제 생각이 다르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건강한 공격성은, 나로 하여금 성공하게 하고, 큰 목표에도 호승심으로 달려들게 하며,
점점 익숙해져서 더 많은 성공을 쟁취하도록 할 것이다.
실제로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씩 하나씩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가니,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가 확실하게 넓어져가고 있다.
또한 나는 이전에 온통 두려웠으므로 나의 실력이 부족한 것은 곧 자신감 상실과 자기혐오로 이어졌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인 그대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기에, 오늘의 부족함이 내게 불안함과 무서움으로 다가올 필요도 없다. 내일은 더 나아지고 그만큼 성공이 더 가까이 오는 것이다.
성공은 많은 이들이 원하는 만큼 쟁취하는 것이고 싸워서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격성이 없으면 안주 외의 성공을 위한 도전이 온통 괴로움일 뿐이겠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나는 이제 나를 지킬 수 있고, 그렇기에 도전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다. 도전을 즐길 줄 알아야 성공할 수 있고, 부족한 자신이 끝이 아님을 알아야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뭐든지 새 시작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나 역시 이번 브런치 스토리에 직접 그린 그림을 올리는 작은 도전을 해 보았다. 지금은 작지만, 나중엔 이러한 에세이를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고 싶어서 작은 발걸음을 내딛어 본 것이다.
아직 내 이빨도 발톱도 작아서 적은 시간만 투자했고 나의 실력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실력도 담도 즐거움도 올라서 결국 내 꿈을 이루어줄 것을 믿는다.
부디 나의 작은 도전들이, 그리고 이 글이, 공격성을 스스로 회복하려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이를 성공시키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그만 영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