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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홍시 Feb 27. 2024

바람을 담아 탑을 쌓는다

건강하게 바랄 수 있는 마음



바람의 이면



 나에게는 많은 바람들이 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싶고, 공채에 합격하고 싶고, 경제적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고, 연기가 늘고 싶고 자기관리도 더 잘하고 싶고, 그림도, 글도, 노래도 잘하고 싶고...


 그 바람은 나를 열심히 움직이게 했으나, 꼭 그만큼 도망치게 했다. 그 행동력만큼 올무가 되어 나의 발목을 잡아채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건강하고 싶은 만큼 불건강한 나와 마주했고, 그것이 지긋지긋해지고, 공채에 붙고 싶다는 희망은 어느샌가 내 부담감으로 자리잡아 나의 꿈을 좀먹었으며, 많은 욕심은 결국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되어 나를 옥죄고 무너뜨렸다.


결과를 이루지 못한 간절함은 자기혐오와 재도전에 대한 공포로 물든다. 내 바람이 강한 만큼 내 안의 나는 항상 모자랐다. 좋은 게 많은 만큼 싫은 것도 많았고, 즐거운 게 많은 만큼 두려운 게 많았다. 그래서 내 안은 항상 전쟁이었다.


 나는 작년 이맘때쯤 성우 선생님께 물었다.

열심히 하지 않는 내 자신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나더러 열심히 산다는데, 난 내가 너무 미웠다. 결과를 이루지 못하는 과정까지 미웠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미웠고, 재도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모습도 미웠다. 어느새 그 미움은 처음의 순수한 바람까지도 원망하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런 바람을 가져서. 주제도 모르고.


미움에 푹 젖은 바람은 힘을 잃어서, 행복해지려 시작한 내 마음을 절망으로 물들였다. 감히 행복을 꿈꾸려 한 내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의 바람이란 어쩜 이리도 연약한 것일까.


그렇게 나는 몇 년을 빙빙 돌았다. 매번 스스로 꿈꾸고 도망치고 미워하면서 버텼다. 스트레스로 얼굴 반쪽이 마비되기 전까지.


얼굴이 마비되고 나서 8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전의 굴레를 벗어나려 애썼다. 미워하지 않으면서 바람을 가지는 방법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 건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만 가능한 줄 알았다.


그렇지만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내 나이 30 초중반, 한창 강건할 시기에 이미 스트레스로 얻은 지병이 여럿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요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본을 고쳐야만 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



혹시 항아리 게임을 아는가?

몇 년 전에 게임 BJ들 사이에서 꽤나 유행한 게임인데, 지독한 난이도로 악명이 높았다. 항아리 안에서 상반신만 내민 남자가 나무막대 하나를 가지고 건너뛰기를 반복하여, 이 땅에서부터 우주까지 나아가는 단순한 목표의 게임.


 그러나 한 번 한 번이 내딛기도 어려운 데다가, 한 번이라도 헛디디거나 막대를 잘못 걸면 처음으로 떨어져내리는 꼴을 봐야 했다.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라면, 엔딩까지 족히 몇백 번에서 천 단위 이상의 뜀뛰기를 해야 했고, 그 중 한 번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BJ들이 이 게임을 하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소재로 많은 영상이 생겼었다.


나 역시도 이 게임을 하다가 운 좋게 웬만큼 올라갔더니, 이어서 뛰기가 정말 싫었다. 모처럼 쌓아올린 나의 결과가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게임을 그대로 껐고 지금까지도 다시 켜지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화를 내거나, 망연자실하던 이유, 그리고 내가 중간의 자리에서 더 올라가기를 주저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 탓이었을 것이다. 내가 쌓아올린 시각적 결과가 사라지는 순간, 내 모든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무의미했는가?


항아리 게임의 고수들을 보면, 고작 몇 번의 시도만으로 어려운 구간들을 훌훌 넘나들었다. 그들 역시 처음 구간으로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순식간에 복구해냈다.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의 남자가 어디에 있든지 기코 엔딩을 맞았고, 항아리 남자의 현재 위치는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그동안 항아리 남자의 위치, 고작 헛발질 한 번으로 와르르 무너질 그 위치를 결과로 삼고, 내 실력의 위치라고 믿었다. 진짜 실력은 그런 게 아닌데도. 내 노력은 그 남자가 떨어지건 올라가건 간에 상관없이 내게 그저 존재하는 것임에도.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면 아예 없는 실력 취급하던 나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 목표로 삼은 '결과'라는 것은 아주 변덕스럽고, 쉬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나는 아직도 삶이 벅차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8개월 여간의 고생이 마냥 헛것은 아니었는지, 이제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알 것도 같다.


진정한 행복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고 한다. 조건부 행복은, 그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행복 역시 사라질까 두려워 그 자체만으로도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온다고 했다.


결과를 상정한 나의 노력, 목표를 달성하는 잠깐의 행복을 위한 나의 괴로운 과정들은 날 행복하게 할 수 없었다. 결과에 집착하는 순간, 내 모든 과정들은 결과를 의식하며 벌이는 고통스런 몸부림이 되었다.


내가 찾은 답은 그저 돌탑을 쌓는 것이었다. 바람을 담아 시간이 깃든 돌을 하나씩 올리는 것.


돌탑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내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채에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고, 2차까지 합격했다가도 마지막 면접 때 얼굴에 마비가 올 수도 있고, 설령 붙었더라도 출근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결과란 그토록 불안정한 변수 덩어리다.


그러니 이제는 조급함이나 두려움을 버리고, 그 탑을 쌓는 시간이 내게 허락되었음에 고마워하려 한다.


내 꿈에 닿으려면 몇 개를 쌓아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를테면 성우 공채시험에 합격하고픈 마음을 담아, 나의 시간을 바쳐서 하나씩 쌓은 돌이 몇 천 개가 되어야 합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의 시간을 묵묵히 붓다보면 하늘에 닿는다는 것이다. 아직은 너무나 막막하더라도, 내가 가진 돌이 너무나 작더라도. 중간 중간에 얼마나 무너지더라도. 붓다보면 언젠가는 무엇이든 하늘을 뜷는다.


어차피 평생 돌을 쌓으며 살아야 하는 삶, 그 돌이 하늘에 언제 닿는지를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냥 돌 쌓는 기술이 늘어나는 기분을 즐기고, 돌을 고르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방향을 찾아 거기에 돌을 쌓으면서, 돌을 쌓을 기회가 오늘도 있음에 기뻐하는 것.


결과가 아니어도 그 매순간 돌을 올리는 기술이 늘어나는 그 자체를 기뻐한다면, 내 돌탑이 쉬이 무너지는 것이 더이상 나를 울게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돌탑이 높다고 일희일비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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