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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리A서티 Oct 04. 2023

진학데이터는 나쁜 통계인가?

사회적DNA화를 부추기는 자료라면 

이번 추석에도 대학을 가고자 하는 고3 수험생들은 연휴의 달콤함을 멀리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미래를 기약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학교에 재직하는 교사의 공통적인 업무이기는 하지만 특히 담임, 그 중에서도 고3담임을 하게되면 학급의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고, 그 상담의 내용중 상당부분이 대학진학관련 상담에 할애하게 된다. (참고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학교의 상담구조도 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전문화, 집중화하여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미래를 건설적으로 서로 논의할 때, 모든 학생들의 최종관문이 대학이 될 필요는 없으며. 미래에는 더욱더 대학이라는 상급교육기관은 그 학생의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그러나 선택가능한 옵션 중 하나로 남는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금의 상황은 미디어를 통해 자주 보도되듯이 학령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인해 기본적으로 대학이 남아도는(?)시대가 되어버렸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서열화된  피라미드구조의 대학들 중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들에 진학하기위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이번 2024년도 수시모집 경쟁률을 보면 확인된다)


고등학교에서 진학지도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상담을 고려할 때 1,2학년때는 학생의 성적에대한 분석과 미래 대학진학의 예측가능성 및 준비방식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는 경우가 많고, 고3이라면(특히 고3, 1학기가 끝난시점에서는)본격적으로 지난해의 대입관련 데이터를 기준으로 지원할 대학을 가늠해보게 된다. 이 때 주로 사용하는 대입진학관련 데이터들은 몇가지가 있는데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자의적으로 수집하여 가공한  이전해의 지원자들의 합불에 관한 데이터를 모아놓은 자료나(대교협이라는 단체에서 제공한다.) 사설입시업체가 제공하는 자료 혹은 대학자체가 제공하는 입결자료(요사이는 거의 모든대학이 자료를 제공하여 통합적으로 자료를 제시한다.)를 활용하게된다. 정시의 경우에는 이전년도의 데이터로 어떤학생의 합불여부를 예측할 때 합격예상값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작으나. 우리나라의 수시의 경우에는 (특히 학생부종합전형) 정량화된 성적이외에 생활기록부에 적힌 내용도 평가에 활용되므로 합격자 평균예측치와 오차값의 범위가 커질 수 밖에 없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진학데이터를 활용한 합격예측에는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교사로서 진학상담을 할 때 좀 더 정확하게 합불여부를 판단하고 안내해 줄수 있어야한다는 부담과 사명을 가진다. 그런데 그것과 달리 가끔 머리속에 이런 질문이 떠오르곤 한다. 문득 진학상담에서 사용하는 학용데이터가 좋은통계인가 나쁜통계인가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


좋은통계 나쁜통계?

통계데이터가 나쁠 수 있는가라고 되물을 수 있겠다. 통계자료가 기본적으로 나쁠 수 있으려면(?) 통계자료의 부정확할 경우가 첫번째 일것이다. 부정확하고 오류가 있는 통계자료는 그 자체로서 효용가치가 없기에. 그리고 정확한 자료이더라도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통계를 활용(혹은 악용)하는 경우에도 그 통계가 나쁘다라고 보여질 수도 있겠다. (정확하게는 이것은 통계활용의 네거티브이겠지만.) 물론, 부정확한 가짜(?)통계자료를 나쁜 의도를 가지고 악용한다면 최악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작년에 대입지원자의 성적을 기반으로 만든 합불에 관한 자료는 정확성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크게 없다. (위에서 말한 대교협자료와 같은 자료들은 '공익적' 목적의 데이터 이므로 그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럼 왜 위와 같은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을까? 내가 말하고싶은 진학자료의 가치에 대한 의구심은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자료가 활용되는 방식과 그것의 여파에 관한것이다.


우리사회의 불합리하고 개선해야할 문제점중 하나로 오랜시간동안 거론되어져 오면서도 감히 해결하기 힘든 것이 바로 학벌문제이다. (지금의 의대광풍은 직벌문제라고 칭해야 할 까?) 우리나라에서 벌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정도와 속성에 대허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과 관련된 너무나 깊은 문제(과도한 사교육 등)를 고려할 때, 그것의 폐해와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공감할것이다. 현실적으로 대학교간 평판도 차이 자체는 조금은 과격한 평준화의 길을 걷지않는이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의 평준화가 한국과 같은 과도한 입시경쟁의 사회에서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유럽의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대학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많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경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긴 하지만 경쟁을 어느 한쪽면으로 극단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의 결과 생기는 평판도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우리사회가 대학진학을 신호효과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그것이 한국식 학벌문화 아닐까) 대학입시의 결과로 결정되는 누군가의 대학은 그 사람의 '사회적 DNA'처럼 낙인 찍혀 평생동안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 소설가 이윤가의 어느 소설에 나온 한 대목 중 이 문구가 기억난다. '에이 그래도 그 사람은 00대학교를 나왔잖아요'. 인종으로 치자면 조상 중 흑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흑인으로 분류하는 상황처럼 우리는 어떤 대학교를 나오면 영원히 그 대학출신의 인물이 되어버린다. 내가 나온 대학은 대학졸업후의 나의 노력의 결과나 대학졸업을 기점으로 상대적으로 늦게 발현될 수 있는 누군가의 잠재력보다 훨씬 공고하고 길게 그 누군가의 배경을 따라다닌다. 물론, 지금의 한국사회가 예전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최소한 고등학교의 교실에서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학벌'은 오히려 기성세대보다 더욱 공고화되고 더 지독하게 세분화되어지는 느낌이 있다. (지금은 대학의 서열이외에 지역간의 단절 즉, 서울권과 지방권으로 나뉘어져 그 분화의 양상이 이중으로 나누어져 있다.)

위의 나의 비유를 이어받아 좀 더 내 멋대로 비유해보자면, 학벌이라는 사회적 DNA가 결정되면 '이기적 유전자'에서 나오는 말처럼 그 DNA속의 유전자(학벌)는(비유의 편의를 위해서 여기서 DNA와 유전자의 포함관계와 차이점은 논외로 하겠다) 자신의 유기체(졸업장을 쥐고 있는 각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존속을 유지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즉, 00대학교 졸업생으로서의 인생이 결정되고 그것은 영구적으로 변치 않는 어떤 속성이되고 지속적으로 사회속에서의 유효함을 유지,존속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비유긴 하지만 그런 비유를 받아들일때, 상기했던 '나쁜 통계학'으로서의 진학정보가 발현된다. 그때의 진학정보란 대학졸업장으로 영구결정되는 어떤 유전정보를 분류하는 데이터로서 기능하게 되고 이런 분류의 비합리적인 영구결정성(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을 위해 기능하는 데이터를 나는 결코 기쁘게 바라볼 수 만은 없다.

 

미래와 경쟁하는 과거와 현재

유명한 심리학자인 조던 페터슨의 한 유명한 강의에서 IQ에 따라서 직업군을 분류하는 설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마음이 착잡했었다. 타당성이 있을 수 있으나 만약 그러한 분류법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한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것이다. (즉, 상관관계에 대한 타당성에는 어느정도 동조할 수 있으나 그것이 인과관계와 같은 '결정론'으로 치닫는다면 거부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서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간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의 긍정적 효과를 부인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공정한 과정과 기회를 부여받은 정당한 '경쟁'은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나, 영구결번과 같은 효과를 내는 절대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학벌의 부당한 낙인효과에 대해서 경계하며, 특히 그런점이 오히려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므로 (즉, 대학이후의 경쟁에서 거둔 정당한 승리의 가치를 폄훼시킬 수 있는 가능성때문에) 비판하고자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가타카'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가타카라는 영화의 결론은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우주비행사로서 '부적합'한 자격을 갖춘 주인공이 부단한 자신만의 노력과 속임수를 통해 우주비행에 나서더라도 그 비행이 실제로 부자격자이기 때문에 실패했을 지, 아니면 그의 후천적 노력으로 극복하여 성공하였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선천적, 혹은 기득된 어떤 자격이 영구히 그 사람의 나머지 인생을 재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일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영화로 부터 읽고 싶다. 


누군가의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함수가 아니라 미래와 경쟁하는 그런 구조의 진행 방정식이라고 생각하기에. 너의 과거와 현재는 지금도 너의 미래와 경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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