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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어린이 Dec 09. 2023

나의 육아 선생님

 아들이 일어나 엄마를 찾았다. 나는 “엄마는 회사 갔지”라고 거짓말을 했다. 평소 아내는 아침 일찍 출근했기 때문에 아이를 등원 준비를 시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몸이 아픈 아내의 손을 빌리지 않기 위해 아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이날 따라 아들의 등원 준비가 쉽지 않았다. 몇 숟가락 떠먹이고 옷을 입혔지만, 어린이집을 가지 않는다고 떼를 쓰며 자꾸 옷을 벗었다. 말도 잘 못 하는 아이를 달래기도 했고 “너 집에 혼자 있을 거야?”라고 말도 안 되는 협박도 했다. 그러던 중 시계를 보니 지금 가도 첫 시술 시작 시각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아이에게 화를 냈고 언성이 높아졌다. 그 순간 아내가 안방에서 나왔다.     


“왜 애한테 소리를 쳐”라는 아내의 말에 나의 화가 아내에게 번졌다.

"나 첫 시술 몇 시에 하는지 뻔히 알면서 누워있어?"

“잠깐 나와서 애 등원 시키고 와서 좀 쉬면 되잖아?”     


 처음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침부터 언성이 높아졌다. “환자분 호출했습니다.”라는 문자에 우는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도망치듯이 집에서 나왔다. 최악의 출근길이었다. 나쁜 아빠와 남편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의사가 되어버린 나는 순식간에 찾아온 좌절감에 운전하기가 어려웠다. 병원에 도착해 연달아 시술을 몇 개 끝낸 뒤 의자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아이를 잘 달래서 어린이집에 보내고 왔더라도 결과적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자괴감에 빠진 나는 얼굴도 모르는 ‘육아 선생님’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학생 시절 성형외과 수업 때 일이다. 성형외과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에 흥미진진한 수업을 기대했지만, 대학 병원에서 성형외과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화상, 외상, 암 환자의 재건 수술들이 대학 병원 성형외과의 주된 일이었고 강의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미용도 성형외과의 중요한 분야이니 당연히 수업 내용에 들어가 있었다. 강의가 거의 끝나갈 때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원 교수님으로 계시다가 지금은 강남에서 미용성형을 하시는 선생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주실 거예요."     


 강의 마지막 날 코 수술 특히 그중에서도 재수술의 대가라고 소개받으신 P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됐다. 대학 병원의 병적인 증례만 보다 미용 환자 증례들을 보니 학생들의 집중도는 높았고 전후 사진들의 비교에 연이어 감탄사가 나왔다. 그렇게 준비해 오신 강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P 선생님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다. 



    

 언청이, 의학적 용어로는 구순구개열이라고 부르는 병이 있다. 입술이나 잇몸 또는 입천장이 갈라져 있는 선천적 기형을 말하는 것인데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많았지만, 이제는 아이가 태어나고 점진적으로 수술을 하게 되면 대부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질환이다.    

  

 P 선생님은 해마다 캄보디아 의료봉사를 다니셨다. 누구 하나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언청이 아이들은 수술을 받고 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니, 입이 갈라져서 불편하고 놀림을 받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는 P 선생님은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의느님’이었다. "몇 해 전 일이었어요."라고 P 선생님은 말씀을 시작하셨다.


"해마다 방문을 하다 보니 이제는 캄보디아를 가면 전역에서 환자들이 모여들더군요. 그중에서 어린 딸아이 손을 꼭 잡고 수술 방에 들어온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시골 먼 곳에서 언청이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를 오토바이에 태워 꼬박 2박3일을 운전해서 왔던 아버지였습니다.“     


"수술대에 아이를 눕혔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울며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이면 전신 마취를 시행하고 하면 되지만 그곳에서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부분마취만 가능합니다. 입을 수술해야 하는데 아이가 울면 제아무리 수술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수술을 할 수가 없지요."    

 

"아버지는 아이를 품에 안아서 달랬습니다. 저는 그사이 다른 아이 수술을 했습니다. 다시 그 아이를 눕혀 수술을 시도하는데 또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달래고 저는 다른 아이를 수술하고를 반복했습니다. 딸의 병을 고쳐주고자 그 멀리에서 달려온 아버지를 생각하면 저도 꼭 수술을 해주고 싶었는데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봉사활동 기간이 끝날 때까지 누웠다 안겼다 반복했지만, 수술은 받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웠죠." 

    

"딸에게 정상적인 삶을 선물해주고 싶어 타국에서 온 의사를 만나러 힘들게 왔지만 계속 울기만 하는 딸을 보며 그 아버지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 아버지도 지치고 힘들었겠죠. 이 순간만 참으면 되는데 참지 못하는 딸이 답답하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딸아이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울 때마다 품에 안고 조용히 달래주었습니다. 그걸 보며 저도 아이를 키우는 처지지만 그 아버지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의 부족함을 순간순간 깨닫고 또 그러한 일들이 반복된다. 일하는 보람과 즐거움이 환자에서 오지만 또한 괴로움도 환자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걸 알았던 나는 이제는 삶의 행복이 아이에서 오지만 힘든 순간들도 아이를 키우면서 맞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의사라는 직업, 그리고 부모라는 것을 선택하고 유지하는 것은 일과 아이가 주는 삶의 보람과 행복이 그 무엇보다 큰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힘이 들 때는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고 조언을 구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학생 때는 P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가 보다 했고, 그 뒤로 이 이야기를 따로 생각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를 낳고 애를 키우며 힘에 부칠 때 이 이야기가 곧잘 생각났다.      


 당직 이후 피곤함에 절어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깬 아이를 달래며 잠을 이기려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거나, 한쪽 발로 서있으며 그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이가 이유 없이 떼를 쓰는 순간에 그 아버지가 생각났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나만의 육아 선생님이었다. 내 품에 안겨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아이를 떠올렸고 언제나 위로를 받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아이와 아내에게 좀 더 너그럽게 대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이 괜찮은지 물었고 아침에 언성을 높인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꼭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P 선생님은 계속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다니셨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P 선생님은 수술 방에 들어온 어딘가 낯이 익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옆에는 이제는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로 큰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배경 출처: 불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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