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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비틀 짝짜꿍

by 디엔드



어릴 때는 사소한 일에도 많이 노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는 살아가는 일이 싫다가도 또 언제는 살아봐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믿음은 없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살아가보려고 합니다.
- 이슬아, 깨끗한 존경







1.

어제 8년간 함께 지낸 거북이, 하부기를 보냈다. 도마뱀 파충류샵 사장님이 자신의 애완 거북이랑 같이 키워주겠다고 하셨다.

중학생 때, 내 밥은 안 챙겨 먹어도 애호박을 꼭 사서 집에 갔고, 여름엔 좋아하는 수박을 사서 나눠먹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 시간을 혼자 지냈는데 하부기만큼은 늘 곁에 있어줬다. 그때 나는 약속했었다. 오래오래 함께 하겠다고, 넌 절대 버림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 주겠다고.

호스필드 거북이에게 8년이라는 시간은 인생의 1/5 정도를 살아낸 것이다. 자신보다 더 느린 주인을 만나서 고생한 지난 나날을 떠올리니 무척 미안해졌다.

정말, 정말 고마웠어. 이젠 더 행복하게 살아.


많이 그리울 거야





2.

평생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이유는, 곧 이사를 간다. 엘베도 없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18평 집으로. 이 환경에서 하부기를 키울 순 없었다. 처음엔 부모의 이혼과 대출의 피해자가 내가 됐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한동안 그 여파로 매일 염소물에 머리를 박고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수영을 했다는 뜻이다. 캐모마일 차도 마셔보고 Eric Prydz의 Opus라는 곡을 들었다. 9분 동안 가사도 없는 오묘한 비트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니 살 것 같았다. 이제 나를 지키는 방법을 조금 알 것 같다.


짐정리를 하면서 12년간 살았던 이 공간엔 삶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느낀다.

많이 컸군.

벽에서 키를 재던 유치원생은 곧 스물이 되고, 고등학생이었던 오빠는 서른이 된다. 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성장을 했을까? 성장통 때문에 잠을 설치진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적당히 쓴 밤을 보내고 있다.





3.

해열 작가님의 문장을 오래오래 곱씹는 중이다.


스스로를 반으로 갈랐다.

되고 싶은 어른이 없어서, 외로워서, 사람이 필요해서, 엄마랑 아빠가 필요해서, 내가 듣고 싶은 격려와 적절 한 도움을 받고 싶어서 스스로를 반으로 나눴다.

내가 나를 낳았고, 내가 나를 키웠다.


5월 중순 이후로

나는 내가 불쌍해졌다.


지금까지 내가 살쪄서 죽으려고 한 줄 알았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살쪘다고 그래. 오래 쌓인 게 터졌던 거였잖아.
이젠 좀 알아주길 바랐는데 아니었네. 그동안 믿고 용서했던 시간들이 너무 후회된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 속에서 멍청하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나는 나를 용서했고, 나를 둘로 쪼갰다. 보호받지 못한 시절이 서러워서 이렇게 살게 됐다.

보란 듯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4.

오랜 고민 끝에 폰을 바꿨다.

얘들아 나 폴더폰으로 바꿨어, 아? 갤럭시 Z폴드? 너 아이폰 유저잖아. 아니 진짜 구식.. 3g.

현시대에 3g폰을 들고 산다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종종 부끄럽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전화를 받을 때면 약간 곤란해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내 손에 머무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음.. 아저씨도 이런 폰 오랜만에 봐서 신기하죠? 저도 신기해요. 카톡도 없고, 음악은 mp3로 변환시켜서 넣었어요. 근데 이렇게 느리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며칠 전, 일기장에 글을 적어뒀다.

제목은 [언젠가는 하게 될 말]


제 인생 최고의 한해였습니다.

마침내 지옥 같던 집을 떠날 수 있었고, 부모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고, 꿈꿔왔던 대학에 진학했고,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사랑하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되었고, 건강한 습관을 들이고 있고,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갑니다.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덕분에, 그리고 제가 노력했기에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았습니다. 앞으론 지금까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걸 돌려주고 싶습니다.


/


한동안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자꾸 어둡게 보여서 위축되는 순간이 많았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희망을 가지는 것과 내겐 상황을 바꿀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었다. 빛나고 있을 순간을 오래, 자주 떠올렸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포기하지 않는 한 원하는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에 수렴할 것이다.

지독한 확률싸움에서 승자가 되어보자.





+

https://youtu.be/cDYZV_aTr8c

더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어, 그렇게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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