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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가는 사람이 이긴다

열여덟, 고시원 생존기 62일 차

by 디엔드



1.

9월 8일, 오전 8시. 빨래를 돌리러 라운지에 갔는데, 실장님을 만났다. 나는 속상한 일이 생겨서 아침부터 울고 있었기에 못 본척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ㅋㅋ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그 뒤로 1시간 반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분이 살아온 이야기는 큰 동기부여가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 이후에 바로 특수부대를 들어갔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1년 내내 경찰학원에서 꼴찌에 가까운 성적으로 결국 퇴출당했지만, 하루 14시간씩 공부해 불과 20일 만에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마치 장원급제 영웅담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밤샘 공부하고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그때 시험을 보고 느낀 건


끝까지 가는 사람이 이긴다.


였다고 한다.


나는 멘탈이 약해서 고민이라는 말을 했고, 이미 멘탈은 충분히 강한 거 같은데 스스로를 조금 더 믿어보면 좋을 거 같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이 보기엔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치열하게 지내고 있는 거 같으니 잘하고 있다고, 믿어보라고.


이외에도,

"타인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선을 긋는 연습도 해봐야 해요.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실수한 일에 대한 사과는 분명히 해야 하고, 남에게 상처를 받고 속앓이 하면 본인만 아파져요."

"좋아하는 걸 찾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도전하다 보면,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좋아했었네? 하는 순간이 와요. 그게 또 자신을 단단하게 해 주거든요."

"슬플 땐 울고, 다시 마음 다잡고 하면 되는 거예요."

같은 말을 들었다. 운동하고 잘 먹으라는 따뜻한 잔소리는 덤..(?)


그리고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놓고 얼굴을 넣고 있으면 3분도 못 버티고 나오게 되어있다고, 머리론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도 몸은 살고 싶다는 걸 느낄 수 있다며 힘든 순간을 대처하는 법도 알려주셨다. 실장님은 아쉽게 최종에서 불합격해서 이번엔 다른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시기에 시험을 본다고 하셨다. 시간을 내서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는 게 쉽지 않은 걸 알기에 더욱 감사했다.


비타민 잘 먹을게요 :)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좋은 어른을 만났다.

'실장님도 이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나도 30대가 되면,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으려나? 그땐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경험한 만큼, 생각한 만큼 자신의 세상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고 싶고, 새로운 세상을 확장시켜보고 싶다.







2.

기쁜 일도 생겼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나에겐 기쁜 일이다. 공부를 시작하며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건 ‘국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 국어를 왜 못 풀어? 너 한국인 아님?


작년 여름, 무기력에서 겨우 빠져나와 수능 학원에 등록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는 치열한 곳에 들어가면, 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거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벌점만 제일 많이 받고 나왔다. 심지어 하루 종일 졸았고, 틈만 나면 조퇴를 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매번 모의고사 1교시만 되면 눈이 안보였다. 초점이 안 맞고 어지러워서 국어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눈이나 뇌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병원을 다녔는데,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은 '심리적인 요인'.


해결하고자 먹었던 약은 부작용으로 손이 떨렸고 블랙아웃 현상과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서 그렇게 벌점을 많이 받았던 거다. 그때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시험을 볼 수 없겠구나,
이대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하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자꾸 겹쳐져서, 그 해에 모든 걸 놓으려고 했다. 그렇게 환불받은 학원비는 모두 병원비가 됐다.



/



퇴원 후 3개월 뒤, 다시 공부의 끈을 잡았지만 뇌가 망가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그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못 찾았다. 큰일 났다는 위기감이 앞섰다. 이후에도 자주 무너졌지만, 자주 일어나기를 반복했고 며칠 전에 9월 모의고사를 쳤다.


9월 3일, 새벽부터 준비하고 6시 20분 버스를 탔다. 과학탐구 필기본을 보고 있었는데 멀리서 짙은 쌍꺼풀, 큰 키와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이 다가와서 내 뒷자리에 앉았다. 급격히 속이 울렁거렸다. 흑기사랑 닮았다는 이유로.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 그 순간들이 떠올라서.

그때 하루가 제대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질병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이 되긴 할까. 하며 진짜 너무너무 심란했다.


7시 학교 도착.

일찍 와서 아무도 없었다. 미리 책을 폈지만, 버스에서의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긍정을 선택하자.',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교실로 돌아오니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N수생 혹은 검정고시생은 주로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치지만, 나는 일부러 교내 별도 시험장에서 시험을 봤다. 실전은 학교에서 하니까. 그리고 난 진짜 1교시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하니까!!

타종이 울리자마자 문제지를 넘겼는데, 글자가 선명했다. 너무 선명했고, 내용이 눈에 잘 들어왔다. 긴장도 안 됐고 몸은 편안했다. 그렇게 첫 몰입을 경험했다. 80분이 8분처럼 느껴지는 몰입상태. 그 시험이 끝나고 생각했다.


다시 시험을 볼 수 있구나,
나에게도 가능성이 있구나. 정말 다행이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하루를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좋았어'라고 외쳤다. 성적을 떠나서 그냥 좋았다. 정말 정말 좋았다. 이제 시야가 흐려지는 일은 없으니까, 이번에 해냈으면 다음에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날 모의고사 필적확인문구는

순간들이 모여 삶은 반짝이는 보물이 된다, 였다.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스스로 '멘탈이 약하다' 혹은 '나약하다'는 생각만 하며 살아왔는데, '힘든 상황에 의해 멘붕 한 건 유리멘탈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모든 걸 부정하고 극복할 필요가 없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지워지지 않는 과거가 지속적으로 현재에 영향을 주는 건 괴로운 일이기에 상황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서 상황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힘든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고민해 봤다.


첫째는, 감각하며 살자는 것.

계절 음식을 먹고, 변화하는 날씨를 보고, 좋아하는 향을 맡고, 음악을 듣고, 가끔 찾아오는 짜릿한 행복과 저릿한 슬픔을 느껴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는 긍정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둘째는, 무언가를 기다려보자는 것.

8월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9월 중순에 오픈할 계란빵 가게 덕분이었다.


9월 중순 OPEN.

더 나은 양질의 계란빵을 제공하기 위해
하계기간 잠정 휴업을 하오니 고객님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
coming soon!!!


난 정말 계란빵 가게에 적힌 문구가 없었더라면 고시원 생활을 못 버텼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계란빵 먹기 전까진 꾸준히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니? 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계란빵을 기다리며..



셋째는, 단정한 반복을 유지하는 것

내가 나를 지켜내는 방법은 단순했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 비록 오늘 하루가 별 볼 일 없었더라도.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 봉현 작가




감각하고, 기다리고, 단정한 반복을 유지하다 보면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그 상황을 이겨낼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쓸모보다 가치 있는 건 '존재'라는 걸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빈약했던 삶의 볼륨이 조금씩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

(벌써) 두 달 전에 쓴 일기
드디어 목표치 도달 ㅠㅠ



p.s.

오랜만에 글을 발행하네요. 다행히 저는 이전보다 잘 지내고 있답니다 :) 오늘은 그동안 받던 상담도 종결했는데, 힘든 시기를 함께 해준 고마운 분들과 브런치 독자님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생각하니 애틋.. 한데,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두려운 모든 것들에 용기를 내시길,

가을에도 평안히 존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파이티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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